선행조건

글쓰기 수업에서 시작된 아이 행복에 대한 고찰

by 웬디


I. 글쓰기 수업


긴 프로젝트 글쓰기를 시작하며 전체 맥락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개요 짜기가 필요하며, 개요를 짤 때에는 쓸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하면 된다고 했다. 다음 단계로 내용을 다듬어 줄글로 옮기는 작업을 할 터이니, 내 책에 담고 싶은 내용을 페이지별로 간단히 적어오라고 했다. 그게 지난 국어시간의 일이다. 이틀 전.


그리고 오늘, 개요 짜기 한 내용을 글로 옮겨 책 만들기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모두 열심히 옮겨적고 있는데 혼자 가만히 있는 아이가 있다. 집중력이 약해 종종 그렇게 있곤 하기에 여느 때처럼 가까이 가서 해야 할 일을 말해주었다. 다른 날엔 과제 설명을 안 들어서 멍하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가서 귀띔해주면 주섬주섬 할 일을 챙겨 시작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하기 싫다고 했다. 뭘 하기 싫으니 물으니 글 쓰기가 싫다고 했다. 네 마음은 잘 알겠다고,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하는 일이 있다고, 새롭게 마음을 준비할 시간을 줄테니 조금 쉬었다가 45분에 시작하라고 말해주었다. 마음은 스위치처럼 전환되지 않을테니. 내 나름의 배려였다.

다른 아이들의 활동을 쭉 돌아보고 돌아오기까지 꽤 상당한 시간이었을텐데 아직도 그대로였다. 이번엔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표출하고 싶은듯 인상을 찌푸리고 엎드려 있었다. 지금은 적어온 개요를 글로 표현하는 글쓰기 수업이며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엎드린 채 영어 필기체 같은 글씨로 끄적였다. 일종의 시위다.


옆에 서서 한참 고민했다. 이것이 허용 가능한 자율의 범위인가. 내 감정을 빼고 온전히 생각에 집중했다. 생각의 끝에 나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글쓰기 수업인데 글쓰기를 안 하겠다는 건 바꿔 생각하면 영어 시간에 영어를 안하겠다, 각도 재는 시간에 각도를 안 재겠다, 뜀틀 시간에 뜀틀을 안 뛰겠다, 무용 시간에 무용을 안 하겠다와 같은 의미니까.


아이는 내게 기분 나쁘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 온갖 티를 낸다. 어려서 그렇겠지. 하지만 그 앞에 선 어른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네가 어른이 되면 알까.

이어진 점심시간에 아이에게 설명했다. 네가 열심히 개요를 짰다는 걸 선생님도 안다. 그림까지 그려가며 정말 노력을 많이 했더라. 네가 했던 게 물거품되는 게 아니란다. 네가 생각했던 디자인은 그대로 유지하되 내용을 줄글로 풀어쓰는 것이다. 우리가 읽는 그림책, 동화책, 지식책처럼. 우리가 해야 할 과제 안에서의 자율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등등. 수업 시간에 나는 닳도록 말한다. 그건 너의 작품이니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선생님한테 해도 되는지 묻지 않아도 된다고, 선생님이 정해준 규칙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새로운 시도를 해도 된다고.


이어진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끝까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했다.


자리로 돌려보내고 한참을 생각해보니 아마 아이는 지난 시간 내 설명을 듣지 않았던 것 같다. 개요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았으니 그냥 이 아이는 자기 나름의 작품 하나를 만들어온거다. 드문드문 들은 정보에 기대서. 오랜만에 정성을 쏟은 작품인데, 소중한 작품을 훼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겠지. 최대한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아마 그랬을 것도 같다.


다시 만나는 내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도 고민이다. 잘못한 점들을 꼬집어 잘잘못을 따져야 할까. 내가 이 아이를 훈육하려는 목적은 잘잘못을 가리는 일인가. 아니다. 내가 내일 훌륭한 말솜씨와 논리로 무장하고 훈육을 해서 결국 아이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면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을까. 이 또한 아니다. 내일 단 한 번으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속적으로 이 아이의 문제에 관여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하며, 그러려면 우리의 관계성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고, 나는 생각을 전환한다.


혹시 오늘은 이 아이가 감정이 너무 앞서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닐 수도 있지만 거기에 조금의 희망을 걸고 싶다. 오늘보단 감정이 다소 가라앉아있을 내일, 이번엔 말 대신 글로 소통을 좀 해보려고 한다. 말로 소통을 시도했지만 불통되었던 오늘의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게끔 가능하면 새로운 방식으로.




II. 집중력이 약한 아이를 위해


아이들은 참 다양하다.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각 사람의 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라는 집단 생활의 특성상 집중력이 약한 아이들은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이번의 경우에도 내 예상이 맞다면 이 아이는 집중력 때문에 집중력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그냥 무작정 고집피우는 아이로 보일 수도 있으니.


또 어떤 경우엔 자신감이 떨어진다. 집중력이 약한 아이들은 준비물을 잘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 횟수가 늘어나면 아이는 위축된다. 위축된 채 시작하는 수업이 즐거울 리 없다.


그래서 집중력이 약한 아이에게는 적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교사로서 나의 노력은 수업 중 과제를 제시한 후에 그런 아이들을 먼저 찾아다니는 일이다. 멍하니 있는 시간이 길어지지 않도록 다시 한 번 과제를 안내하는 일.


내 아이가 집중력이 약하다면, 보호자님께서는 특별히 준비물을 꼼꼼히 살펴주셨으면 좋겠다. 매일 알림장과 안내장을 확인하는 일이 정말 수고로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내 아이를 위해 그것만큼은 해주셨으면 하는 게 교사로서의 바람이다. 집중력이 약한 아이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음 둘 곳 없이 힘들다. 어른들이 뭐라 하는지도 모르겠고, 자꾸만 지적 받고, 재미있을 일 자체가 별로 없다. 거기에 짐 하나가 더 얹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중요한 일은, 미디어로부터 내 아이를 지켜주셨으면 좋겠다. 나도 힘들 때는 아이들에게 TV도 보여주고 핸드폰도 쥐어주는 평범한 엄마다. 그래서 절대 보여주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살다보면 엄마도 좀 살자 싶은 날이 오곤 하니까. 그럼에도 미디어에 지나치게 몰입해있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 아이들은 매우 자극적인 환경에 지나치게 오래 노출되어 왔을 것이며 여전히 그렇다. 늘 크고 다양한 소리와 화려한 화면에 길들여져 있다. 하다가 조금 지루해지거나 하기 싫어지면 당장 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결정이 즉시 반영된다. 현실에서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나의 감정이 곧 현실이 되는 환상적인 상황에 점차 익숙해진다.


일상 생활에서는 미디어만큼 자극적인 인풋은 없다. 선생님의 목소리, 친구들의 목소리, 드문드문 음악 소리... 이미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미디어 자극에 못 미치는 이런 것들은 그 아이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일이다.


아이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이미 그만두기로 결정한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건 가히 충격적인 일인 거다. 가상 현실 속에서 나는 늘 그래왔는데, 새삼스레 선생님이, 엄마가 안 된다고 한다. 참 이놈의 어른들이란. 백번 아니라 백만번 양보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거다. 그게 일상이 된 아이 입장에서라면 그게 당연하다.


따라서, 내 아이가 집중력이 약하다면 미디어 시청 시간(컴퓨터, 스마트폰 포함)이 과도하진 않은지 점검해볼 일이다.


얼마 전 TV에 스마트폰 중독인 아이가 나왔다. 아이는 부모님과 놀고 싶지만, 놀아주지 않으니 스마트폰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부모인가?




III. 소모되지 않는 가정을 위해


언뜻 자연스런 귀결 같지만, 그냥 그렇게 결론 내리고 싶진 않다. 교육하는 사람인 나조차도 집에 오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몸도 힘들지만 때로 마음이 그보다 더 고되다. 이미 너무 많은 일을 했고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호자는 아이와 진심으로 시간을 공유할 수 있을까. 보호자의 행복을 쥐어짜 아이의 행복을 만들어내는 일은 단기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늦은 시간까지 노동에 시달리는 부모는 숨쉴 틈을 내기 위해 아이를 자기 삶 한 켠으로 게 된다. 알아서 잘 크길 바라며. 이렇게 슬픈 복불복이 또 있을까. 부모의 손을 떠난 아이들은 여러 환경의 씨줄과 날줄이 엮어내는 교차점 어딘가에서 오늘도 자라는 중이다.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보호자님들이라고 해서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멈춰보려고, 돌이켜보려고 무던히 애쓰기도 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란 벽 앞에서 더이상 해낼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체념한 채 어제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그러니, 진짜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교육부는 단독이 아니라 고용노동부와 한 팀으로서 가족의 미래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가족을 돌려주는 일, 아이를 가족 품에 돌려주는 일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이가 행복하려면 어른도 행복해야 한다.



2020.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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