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나온 장현성씨의 아내를 보고 내가 저렇게 나이들면 좋겠다 생각했다. 순전히 외모로만 그런 것이지만, 내면도 외면을 닮았을 것 같은 느낌. 수수하고 단아한 그 모습이 예뻐보였다.
얼마 전 친구들끼리 단톡방에서 워너비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 내가 장현성씨 아내를 닮고 싶다고 했더니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검색해서 기어이 장현성씨 아내 분 사진을 찾아냈는데, 네이버 이미지엔 내가 설명하고 싶은 그 느낌이 담긴 사진이 없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사진을 캡처해 보여주었더랬다.
그랬던 나만의 워너비 스타가 얼마 전 티비에 다시 나왔다.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사춘기 아이들과의 갈등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훔쳤다.
사춘기, 참 녹록지 않은 시기리라. 부모에게도, 자녀에게도. 그러나 양쪽 모두에게 꼭 필요한 시기. 특히 내가 닮고 싶은 이가 눈물을 흘리니 이 시기를 다시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나의 사춘기를 되돌아본다. 크게 반항하거나 요란하게 지나지 않았다. 늘 무난했던 아이였던 나는 사춘기도 무난히 지났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큰 소리 나지 않았다 뿐이지 그 시기에 나는 할 말을 했다. 부당한 대우와 그로 인해 불편한 감정을 이야기했고, 내 생각은 엄마아빠와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때로는 논쟁을 벌였고, 때로는 울고불고 했다. 그 때 울면서 먹었던 밥맛이 기억이 난다. 그 밥은 딱 사춘기 때만 먹었던 것 같고.
엄마 입장에선 얘 왜 이래 그랬겠지. 머리 싸매고 고민도 했으려나. 신경 쓸 것도 많은데 순했던 너마저 왜 이러나 괘씸하고 서운키도 했을 거다. 그런데, 내가 그 난리를 친 덕에 엄마아빠는 내가 당신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딸이지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거다. 그 과정이 완결이 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는 나도 내 사춘기를 보내느라 셀 겨를이 없었지만, 어쨌든 내가 사춘기를 겪어나가는 동안 엄마아빠도 사춘기 비슷한 시기를 보냈을 거다. 과정은 우중충하고 축축하고 우울하고 머리가 지끈지끈할 지경이었만, 결국엔, 그래서, 드디어, 적당한 거리를 찾게 되었다는 해피 엔딩이 바로 사춘기다.
지금, 내 아이들의 사춘기는 아직 좀 남았고 내 사춘기는 한참 지나왔다. 중간에 낀 나는 양쪽 모두를 생각한다. 내 사춘기를 모델 삼아 내 아이의 사춘기를 대비하는 중이다.
첫째 아이가 일곱 살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엄청 많다. 혼자 밥도 먹고, 혼자 요쿠르트도 까고, 혼자 자전거도 타고 킥보드도 탄다. 혼자 옷도 입고, 혼자 머리도 감고,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혼자 화장실 뒷처리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습이 기억이 난다. 이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던 느낌이 생생하다. 말 못 하던 아기 때 이 아이랑 보냈던 시간이 통째로 생생하다. 모든 걸 나한테 의지하던, 그래서 내가 이 아이의 온 세상이었던 그 때가 어제처럼 생생하다.
일곱 살인 첫째가 일곱 살을 더 먹어서 열 네 살이 된다고 해서 그 기억이 잊혀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사춘기는 부모에게도 힘든 일인가보다.
아이 입장에서 사춘기는 나와 부모의 다름을 발견하고 분리해나가는 일이며 동시에 나를 선언하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많이 부딪히고 한없이 흔들리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 것은 피하는 것보다 부딪히는 편이 맞는 듯하다. 그래야 아이는 부모의 일부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났지만 부모와는 다른 존재로 온전히 독립될 수 있을테니.
부모 입장에서 사춘기는 나의 일부였던-혹은 전부였던-아이를 떼어내는 아픈 과정이리라. 아이가 겪는 고통과는 또다른 차원의 아픔. 그러나 잃는 것만이 이 일의 완결인 아주 긴 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온전히 잃어주어야 하는 일.
나는, 엄마와 너무 가까웠을 때 상처받았던 딸이자 내가 있어야 할 자리보다 멀리 있어서 내 아이가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는 엄마다. 어느 때는 엄마를 내 마음의 자리에서 너무 멀리 보냈나 싶어 미안해하는 딸이면서, 때로는 딸과 너무 밀착되어 나를 잃은 것 같은 느낌에 문득 서글퍼지기도 하는 엄마다.
적당한 거리. 아마도 그 것을 찾기 위해 세상의 수많은 부모와 자녀가 그토록 사춘기를 앓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딱 적당한 지점을 찾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 기간동안 치열하게 싸우며 수백번도 더 거리를 조정하다가 때에 맞게 거리를 조정할 수 있는 의외의 능력을 얻거나.
서른 다섯, 딸이자 엄마인 나는, 그 장렬한 전투 끝에 후자의 능력을 얻고 오늘도 발휘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니, 사춘기에 들어서는 아이와 아이가 사춘기로 접어드는 부모는 그 시간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했으면 좋겠다. 몇 년 후의 나와 내 아이가, 우리가 그랬으면 좋겠다. 부디 상처주지 말고 정해진 끝을 향해 걸어갔으면 좋겠다. 서로가 상처주지 않아도 충분히 아픈 시간이기에 그저 묵묵히 같이 걸어주면 좋겠다. 한쪽이 견디다 못해 등돌리면 상대는 갑절로 더 아픈 과정이라는 것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 마침내 아이는 부모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부모는 내 전부였던 세상을 깨야 하는 과정. 그러나, 그 일은 그 시기에 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감히 힘주어 말하고 싶다. 그 슬픔을 견디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세상에 중요한 것들은 대개 어렵더라고... 말해주고 싶다.
전부였던 너를 애태우며 떠나 보냈으니, 섬처럼 거기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