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행복의 시작점
혼자 무엇을 한다는 것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다소 도태되어 보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세상이 꽤 변해 도전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혼자의 시간을 외로움이 아닌 독립성으로 인지하기까지 충분한 반복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나는 혼자 커피를 마시는 것부터 시작했었다. 시끌벅적한 카페에 들어서 번잡스러운 공기의 무게를 뚫고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포근한 의자에 앉으니 그제야 대단한 걸 해낸 양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지만 당시에는 나에게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 이후로 혼자 영화 보기, 혼자 쇼핑하기, 혼자 식당 가서 밥 먹기, 혼자 바 가서 위스키 마시기 등 새로운 삶의 자양분을 쌓아갔다. 더 나다움이 무엇인지 알아갔다.
그러다 문득 혼자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들의 혼자 떠난 여행담을 여러 번 들었지만 여행만큼은 사랑하는 연인과 또는 가족이나 친구와 가야 한다는 내 오랜 고정관념이 이별과 동시에 탈피를 시작했다. 우연히 그 시기에 친한 후배는 강원도 고성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고 돌아오자마자 또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에 다짐했다. 올해는 기필코 혼자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대개 현실이 버겁게 느껴지면 익숙한 공간에서의 회피를 선택한다. 놓인 현실을 피해 다른 공간으로 도망쳐 숨겨 두었던 무거운 덩어리를 쉽사리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을 때. 웃어주고 반겨주는 익숙한 배려를 덜어내고 오로지 진짜 나로 멈추고 싶을 때.
제주행 항공권을 끊고 에어비앤비 예약까지 마치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남들에겐 거창하지 않을 일상일지라도 내겐 새로운 시작의 의미가 더해진다. 요 근래 마음이 내내 좋지 않았다. 더 넓게 말하자면 서른이 되고서부터 마음이 안정되는 순간을 찾기 어려웠다. 이직 후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도 생각보다 힘들었고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도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숱한 찰나들이 모여 나를 무겁게 만들었다. 어른이니까, 밝은 사람,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나의 장점들이 날카로운 날이 되어 나를 위협해 왔다. 때때로 나의 불안이 나약하게 비춰질까 싶어 애써 밝게 웃어도 보았고 상처의 깊이보다 그 모양을 궁금해하는 이들을 해소시켜주며 아물지 않은 내 마음을 되짚어 보아야 하는 시간이 쉽지 않았다고 끝내 말하지 못했다.
때론 두렵기도 하다. 내 삶에 기가 막히는 행복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까 봐.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온몸을 휘어감을 때 한참 걷기도 했고 좋아하던 드라마를 다시 처음부터 보기도 했다. 명쾌한 방법은 몰라도 나아지려 애써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 걸어갈 길이 훨씬 많이 남았는데 벌써 지칠 수 없으니까.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늘 행복은 감정의 최악선에서 꽃 피우기 시작했다. 마음이 지쳐 풀이 죽을 때면 그런 생각을 했다. 행복이 오고 있다. 맹목적인 행복일지라도 지금보다 나은 시간이 내게 오고 있다고.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숙소와 감귤밭이 보이는 숙소를 예약했다. 제주를 향하는 비행기에서부터 돌아오는 비행기까지 완독을 목표로 책 한 권도 구입했다. 푸르른 오름도 오르고 정처 없이 자연에 둘러싼 길목을 거닐다 LP음악이 흐르는 바에서 위스키 한잔도 할 생각이다. 마음 가는 대로 몸이 이끄는 대로 이곳저곳 다니며 흐트러진 마음을 한 데 모아보려 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초능력이 없기에 앞으로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도통 알 수 없지만 혼자서 해내는 일들이, 새롭게 도전해 보는 순간들이 좀 더 단단한 나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짧지만 의미 있을 나의 첫 여행을 이곳에 잔잔히 남겨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