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제 짐을 싸도록 해요
짐은 챙기기 위해 묵혀둔 캐리어를 꺼냈다. 활짝 열어둔 창가로 바람과 함께 차가운 빗방울이 들어왔다. 봄에 핀 꽃이 조금씩 자취를 감춰갈 초여름. 이맘때 내리는 비 냄새는 수박 향이 난다. 달달한 수박향으로 시작한 청량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아, 여름이 오고 있네. 유난히 계절 냄새를 좋아해 계절향과 함께 떠오르는 찰나들도 많다. 언젠가 오늘과 같은 수박향의 여름 냄새를 또 맡게 된다면 지금을 기억하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순간을.
계획을 가볍게 짠다고 마음먹었는데 떠나는 날이 다가오니 하나 둘 일정을 추가해 꽤 빡빡한 계획이 되어버렸다. 물론 다 지키지 않아도 되고 다음날의 일정을 앞당겨도 된다. 그 누구에게도 의견을 묻지 않아도 될 테니까. 여행이 처음도 아니면서 알게 모르게 긴장되는 마음이 묘하게 마음에 든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난 요즘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며 지냈다. 앞만 보고 열심히 걸어온 걸음들이 대부분 평범했지만 때론 예기치 못하게 넘어지기도 했기에 나를 다독이는 순간들로 채워보고 있다. 그러던 와중 나를 우울의 늪으로 빠트린 원인을 찾았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있었다. 작은 결여를 뻥튀기하는 나의 못된 습관으로 풍요로운 부분에 대한 감사보다 내가 갖지 못한 또는 잃은 결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 둘 이뤄낸 노력들을 보잘것없이 취급할 때가 있었다. 어쩌면 그 냉정함을 무기 삼아 처한 상황을 이겨내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런 내 모습이 버거웠다. 우습게도 나를 위한 일말의 노력이 결국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자기애를 생성시키려 쓴 여러 글들 사이에도 여전히 자신에게 엄격한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이제 조금 내려놓으려 한다. 잘하려는 마음도,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도 한 움큼씩 내려보려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버겁다 못해 이곳저곳에 잔류하는 불필요한 감정선이 너무 많아졌다. 하루를 놓고 보면 크게 유해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누적된 감정들이 출처도 잃은 채 표류하다 결국 어느 순간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책을 읽고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해왔다. 그러한 잡념들이 안 그래도 퍽퍽한 삶을 더 무겁게 만드는 듯하여. 그럼에도 차마 떨쳐내지지 못한 잡다한 것이 자꾸 부정적인 마음을 자아내는 것 같았고 평범한 일상에 감사할 줄 아는 겸손함이 짓눌려 갔다. 운동을 할 때도 쉬어가는 시간이 있듯 긴 인생의 여정에도 때때로 그러한 시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간다.
고작 짧은 일정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참 멋대가리 없고도 거창한 잡념을 주절대는 나 자신이 웃기지만 그렇기에 이 여행이 주는 의미가 특별한 이유다. 꼿꼿했던 나를 조금은 유연하게 만들어줄 시간. 그 소중한 시간 속 나는 나를 더 사랑하며 보내려 한다. 생각보다 자기 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해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간지러운 일인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장 낯선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 결국 이 시간들이 모여 더 나다워질 거라 믿는다.
브런치에 쓴 글 중에 여전히 나의 이별글은 꾸준히 누군가를 통해 읽히고 있다. 통계표를 보면 글에 유입된 키워드가 참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평범한 일상의 글보다 이별의 글이 더 읽히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간절하다. 이별은 매번 낯선 상황이기에 누군가의 얄팍한 조언이 필요하기도 하고 세상에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위안을 받고싶기도 하다. 나 또한 그러한 마음으로 글을 썼기에 아주 잘 안다. 그래서 더더욱 생각이 짙어졌다. 좋은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글도 좋지만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함께 살아갈 공감과 응원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이 주는 의미도 그러하다. 가장 먼저는 나에게, 그리고 다음은 당신에게 비록 인생이 흔들릴 때가 있지만 우린 또 여행 같은 삶을 살아가자고 말 해주고 싶었다. 나 또한 그렇게 믿고 싶기에.
곧 여행을 떠난다. 제주에 비 소식이 전해지지만 괜찮다. 그저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어떤 하루들을 만들어갈지 여전히 설렌다. 여행을 마치고 이 긴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 또 가고 싶다. 라는 감정이 가정 먼저 떠오르길 바라며 오늘은 이쯤 글을 줄여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