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타인의 편지
다행히 제주 하늘은 맑았다. 도착하기 전까지 내렸다는 비로 바닥은 축축했지만 흐린 구름 속에서 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시작이 좋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도 설렘 가득한 사람들의 상기된 목소리도 무엇보다 해내야 하는 일이 한 개도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어놓고 금능해변으로 향했다. 금능해변은 핑크색 하나 없이도 수줍고 예쁘고 사랑스러움이 느껴진다. 검은 돌들 사이에 햇살을 머금은 윤슬이 반짝이고 그 사이로 한입 베어 문 소보로빵처럼 보이는 비양도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구름은 마치 솜사탕 같았다. 이런 황홀한 상황에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단 사실이 희한하게 좋았다. 이번 여행 취지에 맞게 오로지 나를 위한 여행의 시작점이다. 작은 책방에 들려 비건 친구에게 선물할 책 한 권을 사고 나오니 해가 너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오늘을 자축하고 파 책과 술이 함께 있다는 작은 바에 들렸다. 애월에 위치한 [서술]이라는 바에는 익명으로 편지를 쓰고 편지통에 넣으면 다른 익명의 편지를 하나 가져갈 수 있는 재밌는 이벤트가 있다. 이거 하나만으로 [서술]에 들릴 이유는 분명했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르는 완벽한 타인에게 받는 편지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맨 정신으로 쓰기엔 부끄러워 맨해튼 한잔을 마시고 난 뒤 용기 내어 편지지와 펜을 가지고 왔다.
삶이 참 그래요. 난 잘한다고 하는데 어긋나는 순간들도 있고 무너지려는 찰나 한 줄기 빛을 만나기도 하죠. 당신의 오늘은 어느 선상에 멈춰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당신은 결국 행복해지고 말 거예요. 그러니 때때로 지치는 날이 와도 누군지 모르는 타인의 응원을 무기 삼아 힘을 내봐요.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고요한 응원을 넌지시 써보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글로 남기고 나니 한 장이 가득 채워졌다. 편지를 넣고 다섯 개의 타인의 편지 중 괜스레 고민하다 가운데 편지를 들었다.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해 펼쳐 본 편지에는 너무나도 나와 닮은 글이 있었다. 용기를 얻으려 처음으로 혼자 제주에 왔다는 타인은 인생이 흔들리는 시기가 찾아와 방황하다 무작정 제주를 찾았다고 했다. 혼자 걷다 울기도 하고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해도 되는 자유로움에 행복해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벌써 떠나는 날의 마지막 밤이 아쉽다 쓰여있었다. 타인의 마지막 문장에서 멈추어 섰다. ‘지금의 고민이 해결되고 나면 또 다른 고민이 찾아오겠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짐작건대 나보다 나이가 어릴 것 같은 타인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이거만 해결되면 다 괜찮아지겠지? 했던 찰나 새로운 고민이 나에게 ‘안녕? 나 또 왔어’하며 고개를 내밀었을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비단 타인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꼬리의 꼬리를 무는 일이다. 사실 애석하게도 해결 방법은 없다. 무책임한 어른으로 보일지라도 살아보니 그렇다. 받아들이고 나아질 때까지의 각자의 방식으로 흐려지게 만들어 갈 뿐. 책을 읽으며, 산책을 하며 또는 여행을 하며 말이다.
바에 오면 왜 한 잔으로 끝내지 못하는 걸까. 진열된 병들을 찬찬히 보다 탈레스커에서 또 한 번은 시선을 멈추었다. 당신에게 칵테일을 배울 때 처음으로 당신의 잔을 빼앗어 먹어본 술이었다. 그 당시에는 왜 이렇게 독한 술을 먹냐고 물었지만 이제는 너무 맛있게만 느껴지는. 마지막 잔으로 좋겠다 싶어 얼음잔과 함께 주문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한 커플과 나 외엔 아무도 없었다. 대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커플은 나밖에 없음에도 조용한 배경음악에 맞춰 소근소근 대화를 이어갔다. 저들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 어떤 점을 사랑하고 어느 순간 사랑을 느꼈을까 푼수처럼 그들의 사랑이 궁금해졌다. 선택한 편지가 괜찮은지 묻는 사장님께 같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의 편지를 골랐다 말하니 덩달아 신기하다 말했다. 사실 인생의 엄청나 말도 안 되는 슬픔만이 아니더라도 자잘한 감정적 변화에도 때때로 깊은 내적 지진이 찾아온 듯 막연하고 두려울 때가 있다. 나는 그러한 삶을 살다 제주를 찾은 누군가가 내 편지를 골라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이 편지를 읽는 순간부터 행복이 순서 없이 마구마구 찾아왔으면 해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그 사이사이 아무도 몰라주는 당신의 노력들이 모여 결국 당신의 내일은 더 나은 하루가 되길 바라봐요.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찌질한 감정이 있다. 구태어 감정을 표현해 낸다는 게 스스로에게 구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진정 위로가 필요할 때 주저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누군지도 모르는 타인에게 전해받은 용기는 괜스레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술기운인지 혼자 여행 온 주책맞은 감성인지 몰라도 이대로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탈레스커의 맛을 알게 해 준 당신이 없어도, 옆자리가 텅 하니 비어있어도, 사랑 가득한 속삭임이 들려와도 다 괜찮았다. 지금은 혼자라서 행복한 시간이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니 제주의 향이 났다. 여행의 첫날을 꽤 만족스럽게 보낸 듯 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계획을 세울 때 이런 생각을 했다. 혼자 여행온 걸 후회하면 어쩌지. 커플들 사이에서 외로우면 어쩌지. 아직 확언하긴 이르지만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는 결코 느끼지 않을 감정이라는 자신이 들었다. 그냥 왠지 그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