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비양봉을 오르며
얼마 전 당일치기로 제주에 왔을 때 우연히 들린 협재의 한 펍 사장님이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작은 섬을 가리키며 저곳을 가보았냐 물었다. 제주에서 섬이라고는 마라도와 우도 외엔 가본 적 없던 터라 고개를 저으니 언젠가 꼭 한번 가보라고 말했다. 그 섬이 바로 비양도였다.
우연을 좋아한다. 우연히 걷다 들린 카페, 우연히 지나다 들은 노래, 우연히 나눈 낯선 대화. 그렇게 우연히 추천받은 작은 섬에 들어가기 위해 출근 때처럼 아침을 분주하게 시작했다. 수학여행을 왔는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단체와 함께 비양도를 향하는 배에 올라타 아름다운 제주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방파제 사이로 돌아다니는 아기 고양이들도 하늘에 떠있는 뭉글뭉글한 구름도 먼 곳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미소 짓는 옆자리 아주머니도 모든 순간이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6월의 비양도는 초록색 소로보빵 같다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형용을 더해도 6월 비양도를 직접 가본 사람만이 나의 표현을 납득할 것 같다. 푸르른 자연을 눈에 담고 대나무 길을 지나 비양봉에 오르면 산들바람이 지친 얼굴을 쓸어 넘겨준다. 건너편 협재해변이 보이고 군데군데 튀어 오른 오름들로 장관이었다. 오길 잘했다 생각했다.
비양봉을 내려와 비양도 한 바퀴를 천천히 거닐어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걷다가 자주 마주치는 바선생 친척처럼 생긴 녀석덕에 깜짝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물질하고 걸어 나오는 해녀분들의 제주 방언소리와 적절히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철썩이는 파도소리. 모든 순간이 평온하고 느긋하고 차분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와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나가는 배 시간이 여유로워 카페에 들렀다. 카페 옆 작은 학교는 학생이 없어 휴교 중으로 고요했지만 머지않아 아이들이 이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잔디 운동장을 뛰어다니길 바라보았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펜을 꺼내 들었다. 제주로 오기 전 이곳저곳 근처를 돌아다니다 산 엽서에 생각나는 대로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주인공으로 사랑하는 친구 J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안녕, 나는 방금 비양도의 비양봉을 올라갔다가 내려와 비양도 한 바퀴를 돌고 라면으로 이른 식사를 했어. 나가는 배를 기다리며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과 함께 너에게 편지를 써. 너의 서른둘은 어때? 나의 서른둘은 선명해지는 것들은 선명해지고 때론 흐려져 아예 사라지는 것도 생기는, 그래서 평온하다고도 볼 수 있고 위태롭다고도 볼 수도 있는 모호한 선상에 서있는 느낌이야. 잘 해내려는 것들이 모여 때때로 충돌해 그 잔해들로 버거운 순간도 있지만 감사하게도 또 혼자 견디고 일어날 용기를 만들어 내. 책을 읽으며, 자전거를 타며, 산책을 하면서 말이야. 그 사이사이 예기치 못한 기쁨도 있고 늘 날 믿고 응원해 주는 너도 있고. 특별한 일 없이도 갑자기 고민이 깊어지기도 또 가뿐히 털어내기도 하는 나의 서른둘. 이 시간들이 더 단단한 나를 만들어줄 것 같아 설레. 늘 함께 해줘서 고마워. 다음에는 같이 오자. 사랑해 J. 이곳에서 너를 향한 내 마음을 남기고 갈게.
-제주에서 셈케이가-
엽서 한 장을 가득 채우고 나니 돌아갈 시간이다.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작고 귀여운 섬 안에서 수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털어내고 채웠다. 참 웃기다. 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짬 내어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지하철을 탔을 때, 집으로 걸어 들어갈 때. 그러나 그 순간을 돌아보면 매번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더 복잡하기 싫어서. 여유와 자유가 주는 평온함은 생각을 하게끔 이끌어 준다. 체하지 않게 천천히 마음을 비워 낼 휴식을 준다. 푸른 자연이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말이다.
특별한 계기가 없더라도 인생을 살다 보면 다양한 모양으로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곤 한다. 그래서 잘해 오던 일도 다시 돌아보면 엉망으로 보이기도 하고 잊고 살던 추억이 불현듯 솟아올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반대로 그 정도면 충분했는데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했던 순간을 후회하기도 한다. 어릴 땐 술과 함께 친구들에게 토해내고 눈물을 흠뻑 흘려보았지만 그것보다 천천히 내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제는 생각한다.
'왜 별일 없는데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지?'라는 생각이 당신을 맴돈다면, 당신에겐 지금 여유가 필요하다는 증거이다. 누군가와 함께 덜어내는 것도 좋지만 결국 내 삶의 중심은 나이기에 나 스스로 덜어내는 법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나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걸어가고 있으며 비양도를 떠나는 배에 올라타고 확신했다. 나의 정처 없는 우울은 어떠한 계절도, 특정한 누구 때문도 아닌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 쌓여온 무관심이 낳은 감정이라는 것을.
혼자 여행 오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