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또 한 번의 성장통
여행 삼일차가 되니 체력이 다소 고갈되기 시작했다. 특별한 일정이 없어 정처 없이 걷다 눈 앞에 보인 무인카페로 들어갔다. 벽마다 다녀간 사람들의 사연으로 가득 차 있었고 카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글들을 읽었다. 카페 안에 혼자 있던 터라 사랑 가득한 글에 미소짓기도 하고 어이없는 글에 빵 터지다 다시 한번 마음을 후벼 파는 글에 눈물짓곤 했다. 인생은 제각기 다른 모양이지만 인생을 살며 거치는 감정의 정류장은 어쩌면 비슷하게 찾아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이, 지나간 사랑을 후회하는 이, 다시 걸어갈 앞 날을 응원하는 이, 자신의 삶을 고요히 돌아보는 이. 감동과 후회와 아쉬움의 범벅인 글들 사이에서 미안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내게만 다다른 정류장이 아니라서. 다양한 사람이 다녀간 이곳은 고내 포구 앞에 위치한 [카페산책]이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게 된다면 꼭 한 번쯤 들려봤으면 좋겠다.
카페에 나와 바다를 거닐자니 인도가 공사중이라 포구 근처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마당 곳곳에 피어난 예쁜 꽃들과 풀들 그리고 제주만의 감성이 가득 묻어나는 마을에서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렀다. 바다보다 돌담과 꽃이 좋은 나는 우연히 걷게 된 마을을 한 시간 정도 머물렀다. 걷다 만나는 고양이도 반갑고 어딜 찾고 있냐고 물어봐주는 마을 주민도 고마웠다. 문득 언젠가 이런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더해진 순간이었다.
사실 별 거 없다. 그럼에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건 바쁜 삶에서 주는 여유가 얼마나 값진 줄 알기에 순간순간이 소중해지는 것이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싶었다. 걸을수록 가벼워지고 걸을수록 행복해지는 그때가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그립다. 이 자유를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곽지해변으로 가 한적한 곳에 1인용 돗자리를 펼쳐 가운데 철퍼덕 앉고 나니 윤슬에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정수리가 따갑게 타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아이의 고함마저 신나는 멜로디로 들리던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때론 외롭고 힘들더라도 고요히 바다를 보며 스스로를 토닥이며 또 한 번 일어난 용기를 얻는 것 아니겠냐고. 그 찰나 입금 문자가 왔다. 곧이어 엄마에게 문자도 왔다. '커피값이다' 피식 웃음이 났다. 다 큰 딸이 커피 사 마실 돈도 없을까 봐. 엄마의 응원이었다. 요 근래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고 엄마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늘 그래왔든 인생의 일부이니 잘 견뎌내라 단단히 일러주셨다. 딱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엄마와 나의 나이. 문득 엄마 삶까지 어떤 에너지로 살아가야 하나 무섭기도 했다. 고작 서른하고 둘에도 바다를 보며 용기를 얻는데 말이다. 그날은 정말 비싼 커피를 마셔야겠다 생각했었다.
친한 언니에게도 혼자 잘 보내고 있냐 연락이 왔다. 이어 귀여운 조카의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동영상 속 조카는 연신 이모를 외쳤고 여행을 마치자마자 사랑하는 조카를 보러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언니에게는 늘 솔직한 나였다. 기쁨도 슬픔도 가감 없이 말할 수 있기에 마음을 찬찬히 적어 보냈다. 언니에게 '좋은 시간 잘 보내고 있네 내 동생'라 답이 왔다.
어쩌면 이번 여행도, 이번 삶도 정말 잘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