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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Jun 21. 2023

귤밭에서 또다시 시작하기

06 마지막 밤




 3박 4일의 여정 중 마지막 날 묵은 숙소는 최고의 선택이라 말할 수 있었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다 보면 입실 전 호스트가 게스트에게 이용 관련된 사항과 함께 지켜줬음 하는 수칙의 안내문이 길게 보내져 온다. 호스트 입장에서 충분히 안내할 만한 글임에도 때때로 호텔로 갈 걸 그랬나 싶은 순간도 사실 있었다. 마지막 날 묵은 숙소는 현관 비밀번호와 귤 밭 사이에서 그저 편히 쉬다 가라는 말 뿐이었다. 사람 심리가 웃긴 것이 막상 하지 말라는 사항이 사라지니 모든 사용과 움직임에 조심하게 되었다. 청개구리 심보가 따로 없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환호성이 나왔다. 모든 창문으로 넓은 귤 밭이 보였고 고요하고 차분했다. 광활한 귤밭 사이에 나만 두고 모두 숨을 죽인 듯 말이다. 어쩌면 내가 찾던 그런 공간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구석구석 구경을 마치고 나와 한적한 귤 농장 근처 산책을 했다. 새소리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 귤은 이제 막 꽃을 떨구고 도토리 만한 사이즈로 힘차게 달려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걸으니 확실히 마음이 가벼워짐이 느껴졌다. 별거한 게 없었는데 모든 순간이 별거였구나 싶어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보니 꽤나 걸었다. 혼자 묵는 게스트에게도 제공되는 멍하니 불 보기 타임을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지도 모른다.



 개구리 소리가 참으로 청아하게 들려왔다. 중간중간 새소리가 함께 들리기도 하고 짧은 간격으로 비행기 소리도 들렸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그런지 유난히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타닥타닥 나무가 타들어가고 남은 여백을 성시경의 목소리로 채웠다. 대체 인생이 뭐길래. 어른이 뭐길래. 누가 내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던지고 간 것도 아닌데 내내 무겁게 하던 모종의 근심을 타들어가는 불 속으로 던져버렸다. 다행이다. 이번 여행이 다시 원점으로 나를 데려다준 것 같았다. 고마웠다. 그냥 모든 것이.



 씻고 나오니 테이블 위에 수첩이 있었다. 다녀간 게스트들이 남기는 일종의 방명록식의 일기였다. 모르는 낯선 이의 글씨체와 생각이 흥미로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읽어냈다. 대부분이 연인과 온 사람들의 글이었다. 특별한 기념일, 웨딩 촬영, 사귀고 온 첫 여행.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의 설렘과 사랑이 글을 뚫고 내 마음에 와닿았다. 용기 내어 펜을 들었다. 비록 혼자 왔지만 남기고 싶었다. 혹시라도 내가 또 방문했을 때 또는 혼자 온 게스트를 위해 나의 여행 마지막 밤을 남기기로 했다.


 다들 사랑하는 연인들과 오셨군요! 저는 32년 만에 첫 혼자여행을 제주로 왔어요. 제주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의미가 많고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일상으로 돌아갈 것 같아요. 3박 4일 마지막 제주의 밤을 이곳에서 마무리하게 되어 너무 좋아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서른둘. 고민이 참 많은 나이가 된 것 같아요. 복잡한 마음 어떤 식으로 해소시킬까 막연한 고민만 하다 무작정 제주로 왔는데 넓은 귤 밭을 보며 마음먹었어요. 굳이 힘들게 해소시키려 하지 말자.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하루하루 살아가자. 그러면 다 잘 될 거다.라고요. 작년에는 많이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어요. 함께 제주도 왔던 터라 생각나면 어쩌지.. 했는데 다행히 그 사람을 더 응원하는 마음만 들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의미로 참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여기 수첩에 쓰인 많은 연인, 가족,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모두 행복 가득하기로 해요. 다음엔 짝꿍 만들어서 같이 올게요. 즐거운 여행되세요!


 여행 곳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첫날 들린 바에서 낯선 타인의 편지와 나의 편지를 교환하고, 우연히 들어간 무인카페에서 내 마음을 남기고, 황홀했던 마지막 밤 숙소에 나의 생각을 담았다. 이번 여행은 가히 글과 함께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복했다. 그 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지 벌써 이 주나 흘렀음에도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행의 힘이 그러하다. 지친 일상을 잠시 접고 쌓여온 부정적인 감정을 증발시켜 주는 그런 무언의 시간들. 앞으로 일 년에 한 번 정도 혼자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나이를 더한다는 것은 주름이 더해지는 의미를 넘어 하고싶은 말을 참고 하기 싫은 일을 묵묵히 해내가는 힘을 키우는 것 같다. 그래서 이따금씩 감정이 오류 작동하여 고장 나기 시작한다. 하기 싫다고, 힘들다고, 못 참겠다고. 훌쩍 떠나야 한다. 더 곪기 전에 내 마음의 여유를 찾아줘야 한다.



 제주로 떠나는 비행기가 이륙하던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가 하늘로 떴을 때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또 가고 싶다. 너무나.

즐거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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