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보경심 '약희'는 2가지 팩트를 말하지 않았다
요즘은 팩트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기자는 팩트를 쫓는 사람이고 기사는 팩트를 논거로 제시한다. 때론 앱 다운로드 숫자가 될 수도 있고 거물의 발언이 팩트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 어느 것도 온전히 팩트라고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숫자마저 팩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19일) 친구와 함께 "기업이 특정 기간 동안 집계한 트래픽, 가입자수가 과연 그 자체로 팩트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뜬 생각이다. 우리가 이렇게 잘나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잡는 과정부터가 이미 사물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게 집계한 숫자는 과연 어떠한 현상을 객관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것.
보보경심 23화에서 약희가 보여준 행위는 이러한 의구심을 더했다. 결국, 내가 팩트라고 찾아 헤매던 것들이, 결국에는 알맹이만 쏙뺀 나머지 겉껍데기만 주워다 놓은 것이라는 의심만 더해졌다.
지난 추석 연휴에는 정말 정신없었다. 중국 드라마 '보보경심’에 푸욱 빠지면서 총 35편으로 구성된 시즌1의 74.24%(26편)를 단숨에 섭렵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보보경심은 현대에서 청조시대로 타입슬립한 한 여성(마이태 약희)과 황자들과의 우정, 사랑을 다룬 드라마다.
"역시 콘텐츠는 흡입력이 있어야해!"하면서 재밌게 보다가, 보보경심에 매료된 또 다른 이유가 문뜩 생각났다. 특정 장면에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 "상황-분석과 대처 방안 찾기-여파 및 전망-나중에 알고 보니 팩트는"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마치 기사를 구성하는 요소를 찾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최근에 본 에피소드 23을 그 예로 들고자 한다.
에피소드 23에서는 황제의 노여움을 산 약희는 곤장 20대를 맞고 완의국(황궁 세탁소)으로 가라는 명을 받는다.
약희의 의자매이자 봉차궁녀인 옥단은 피고름이 굳어버린 엉덩이 부근 바지천을 뜯어내면서 약희에게 질문을 건넨다. "언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약희는 "페하께서 이유를 발설치 않길 바라실 거야. 이미 내게 관용을 베푸셨어. 내가 발설한다면 사형을 당할거야. 넌 모르는 게 나아."라고 답한다.
강희제로부터 예쁨을 받았던 약희가 곤장 맞고 쫓겨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10황자와 14황자는 당최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약희를 구해낼 방법을 강구한다. 10황자는 "아바마마는 이성적인 분이시니 석고대죄를 올리면 약희를 용서해 줄거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자 14황자는 이를 말린다. "원인을 알아야 청이라도 올릴 것이 아니냐"고 10황자를 제지한다. "이유부터 알아보자"며 상황 분석에 나선다.
그러나 10적복진(정실부인)이 "약희를 아끼시던 분이 중형을 내렸으니 분명 큰일이다. 주청을 드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며 막아선다.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황제가 노해서 중형을 내릴 정도라면 큰 벌을 내린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4황자도 이에 동조한다. "정황도 모르고 경거망동했다가는 약희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해만 끼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는 마치 어떤 사안에 대해 업계 분석을 취재하는 느낌이었다. 일단 황제와 약희의 측근인 황족들의 멘트이므로 공신력도 높다.(ㅋㅋ) 한편 10황자의 발언을 통해 상황파악(다른 말로 취재)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A니 당연히 B"라는 1차원적인 결론을 내려 기사를 쓰면 안 된다는 교훈도 얻었다.
그 뒤로 14황자는 약희가 곤장을 맞은 이유를 파악하러 나선다.
14황자는 약희가 그간 사모해왔(었)던 8황자(그리고 지금 황제의 미움을 받고 있다)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다가 강희제로부터 미움을 산 것으로 추측했다. 이에 대해 약희는 "그런 일이 아니다. 불손한 언행으로 폐하를 노하게 했다"고 일축해 버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 앞에서 경거망동한 행동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한 14황자는 "도대체 네 머리가 어떤 상태인지 열어보고 싶다"며 답답해한다.
14황자가 사건 발발 이유를 듣고자 여러 질문을 했지만 약희는 중요한 사실만 쏙 빼놓고 두루뭉술하게 답한다. 사실 강희제는 자기 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14황자와 혼인할 것을 명하지만 약희가 이를 거부했던 것. 감히 폐하가 시킨 일에 "싫다"고 토달았으니 불손한 언행이 맞기는 하나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절대 안 가르쳐준다. 마치 홍보팀 같다
또 한편 기사를 써야 하는데 구체적인 정황은 알려주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답하고 있으니 답답하다는 14황자의 말은 마치 내 속마음과도 같았다.
14황자는 약희에게 "대체 무슨 일인지 사실대로 말해. 그래야 대책을 강구하고 아바마마의 마음을 돌리지"라고 설득하지만 약희는 "불손한 언행을 했던 것 뿐(이지만 어떤 언행인지는 너에게 알려줄 수 없어)"이라며 입장을 번복한다. 이에 14황자는 "넌 날 믿지 못한다"면서 아쉬워한다.
만일 14황자한테 이같은 사실을 털어놨다면 14황자가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황제와 있었던 일을 함부로 외부에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역으로 약희가 사형에 당했었을 수도 있다. 이는 마치 홍보팀이 어떤 기사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가늠할 수 없어서 함부로 멘트를 줄 수 없는 상황과 비슷했다.
한편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이 내관은 전원생활을 즐기는 4황자를 따로 만나 부탁한다. 약희를 완의국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올 수 있도록 황제께 주청을 따로 드려달라고 말이다. 4황자 또한 약희와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최근 직접 농사를 짓고 농작물을 황제께 선보이면서 황제의 신임을 꾸준히 받고 있는 황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4황자는 "각자에게는 제 운명이 있고, 운명을 따라야 할 뿐"이라고 부탁을 거절한다.
이 부분은 마치, 'A’라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시정이 가능한지 정부 당국에 물어보니 "이건 내 관할이 아니다"라고 하던가 "저쪽 부서에선 뭐라 답했을지 몰라도 이 부서에선 안돼요"라는, 고루한 입장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4황자 너무해! 해결책은 거부한다!
한편 강희제는 14황자를 대장군왕으로 명하고 서북의 적을 대적하라고 지시한다. 같은 공간에 있었던 9황자와 10황자는 "하루빨리 공을 세우라"며 이를 축하해준다. 그리고 4명의 부자는 티타임을 갖는다. 원래 약희가 황제에게 각종 차를 올리며 봉차궁녀를 이끄는 반장역할을 했는데 옥단이 대신 차를 내어온다.
황자들은 "약희가 끓인 차가 생각난다"며 강희제 앞에서 약희를 언급한다. 그러나 강희제는 ’약희’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옥단이 끓인 차가 짐의 입맛에 맞다"며 휘갑을 쳐버린다. 3명의 황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아바마마가 약희를 언급하기 싫어할 정도이니 약희가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이 내관은 옥단에게 "약희가 하던 일을 네가 도맡아라"고 전한다. 이에 대해 옥단은 "언니는 못 돌아오겠다"고 추측한다. 옥단은 약희를 만나 "폐하의 화가 누그러지면 복귀는 금방 될 줄 알았다"고 말한다.
약희가 곤장맞고 완의국으로 쫓겨난 이후 황자를 비롯, 약희를 아끼는 사람들의 화두는 "약희를 자금성으로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을까, 돌아올 수는 있을까"였다. 하지만 약희가 강희제로부터 대단히 예쁨을 받았으니 곧 불러낼거라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제가 약희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제삼자에게 약희의 업무를 일임하는 행위를 통해 "약희를 불러올 생각이 잠정적으로 없다"고 표현한다.
기사를 쓸때도 어떤 한 기업이 A, B, C, D 행보를 걸어가면, 잠정적으로 00라는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없어도 그렇다는 결론을 내린다든가, 그렇다고 하는 전문가 멘트를 넣고는 한다. 강희제가 "약희를 다시 불러올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정황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무슨 탐정 코난 같다.
진실은 : 약희는 4황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4황자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때가 아니라고 결혼은 미루자고 했다.->그런 와중에 강희제가 14황자랑 결혼하라고 한다.->약희는 싫다고 했다->강희제가 뿔라서 약희에게 20대 곤장을 주고 완의국으로 내쳤다
그런데 외부에 명확하게 알려진 이야기는 "약희가 불손한 언행을 해서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는 뿐이었다. '무엇’과 '왜’가 빠진, '결과’만을 두고 약희 주변인들로부터 각가지 오해와 분석이 나왔다. 역시 기사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핵심적인 팩트(원인, 주체)가 없으니 추론이 난무하는 것.
이런저런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대변하는 것 또한 기사의 가치이기는 하다. 물론 팩트를 드라이하게 전달하는 것 또한 기사로서 전할 가치. 그러나 과연 결정적인 핵심을 제외한 팩트(사실상 결과론적인 현상)를 전달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한 회였다.
요즘 외부 세계를 이런식으로 관찰하다보니 모든 것이 허상같다. 나는 정말 핵심을 보고 있는걸까, 내가 핵심이라고 생각한 게 사실은 어쩌면 피부(핵심)에서 떨어진 각질(껍데기)인데 각질만 붙잡고 늘어져가며 "너는 피부야!"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과연 팩트란 있는지, 팩트를 온전히 전달할 방법은 있는지 고민하기 전에 일부터 잘하면 좋은데 자꾸 팩트에 대한 정의론을 펼친다. 그런데 실체가 없으니 답을 낼 수 없고 답을 낼 수 없어서 과연 이 관점에서 사안을 봐도 되는지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내 생각은 내 주관인건지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팩트)로부터 파생된 주장인건지, 이 주장또한 팩트가 되는 건지, 팩트는 무엇인지. 생각을 거듭할수록 혼란이 가중되고 그래서 더욱 갈피를 못잡겠다.
나란 사람의 존재 자체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