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쓰는 건 마치 가시밭을 걷는 기분이다. 이렇게 써도 될까, 이렇게까지 써도 될까, 이렇게 써야만 할까. 늘 고민은 하지만 최선은 없다. 기사는 하나의 명확한 논리만을 전달하는데, 그 정도는 누구도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골몰하지만 자가당착에 곧 빠진다. 특정 논리를 취하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객관성 결여다. 그렇다면 나는 충분히 객관적인가, 아니면 이미 주관의 논리에 빠져 있는가? 분명한 건, 이미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논리의 뒷받침을 찾아 객관화 여행에 나선다는 점이다.
'객관’이라는 마취에 취해 '주관’을 찾아 나선 점은 분명한 팩트다.
그리고 스스로 되묻는다. 난 정말 모든 사실을 고찰하고 있는가? 내가 쓰는 기사는 모든 고찰을 포용하고 있는가? 어설픈 변명이지만, 명확한 하나의 논리를 쓰려면 어쩔 수 없이 배제해야 하는 (소소한) 팩트가 있다. 또한 생각한다, 그 팩트를 배제함으로써 온전히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또한 그를 판단하는 주체는 과연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완벽함을 추구해야 하지만 늘 완벽함을 추구할 수도 없는 현실적인 딜레마 속에서 또 다른 고민에 빠진다.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업무 외 시간을 바쳐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없고 가족도 없고 건강도 없고 내 삶도 없고.. 영원히 그렇게 평생 살아야 한다. 고결한 기자 정신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과 헌신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게 요즘 생각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산업은 고결한 기자 정신을 원하는가, 또 하나의 마케터를 원하는가? 사실 정말 모르겠다.
연구원급의 취재를 필요로 하면서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쉬운 글을 요구한다. 전문가도 일반인인 내가 이해하지 못할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는데 기사는 그것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해 옮겨야 한다. 누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천재적인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문장력은 부수적인 요소란다. 취재가 잘 되면 기사는 어떻게든 써진단다. 그런데 취재가 잘되려면 많은 취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혈연 지연 학연이 긍정적으로 작용될 때가 많다. 그래서 운다. 기자는 대통령을 만나도 당당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미 취재원 탐색 과정에서부터 스스로 작은 사람임을 느낀다.
이따금 기사는 뻔한 포장지 같은 생각이 든다. 내용물은 같은데 초록색 포장지, 파란색 포장지, 노란색 포장지로 바꿔 갈면서 새로운 선물인 체 하는 느낌이다. 속 내용은 같잖아! 변한 게 없는데 변했다고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기사는 날 너무 힘들게 한다. 객관성, 기사체, 리드(아먀), 팩트, 논리 구조 등 너무나 많은 걸 요구한다. 당연하게 내게 이런 것들을 (뻔뻔하게) 요구한다. 내 것으로 소화시킬 시간 좀 줬으면 좋겠는데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너무나 많은 기사들이 나온다. 하나만 오래 붙잡고 세월아 네월아 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똑같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해내는 사람이 우등생이라고 한다면 난 틀려 먹었다. 난 이미 하급생이다.
기사는 잔혹하다. 세상을 직접 바꿀 힘도 없으면서도 세상을 바꿀 힘이 있는 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작은 물결이 모여 큰 파도를 일으킨 힘이 생긴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을 지탱해 나갈 힘이 없는 작은 인간이다.
그래서 술푸다. 난 내가 정말 무엇인가를 잘하는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락에 빠져버렸다. 난 잘하는 게 없는 것 같다. 생각도 없고 주체적인 판단성도 잃어버린 것 같다. 끝없는 슬럼프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더 깊게 빠져드는 것 같다. 왜 그런지,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너 요즘 왜 그래?"라는 대답에도 할 말이 없다. 나도 요즘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왜 사는지도 모르겠는 걸,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