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0227.
회의실의 공기가 차갑다 못해 얼어붙어 있었다. '이걸 한 달간 준비한 기획안이라고 나한테 내미는거야!! 당장 다음 주가 최종 보고 기한인데, 아직도 방향도 못 잡고 뜬 구름 잡는 얘기만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방금 내가 내뱉은 불호령이 천장을 때리고 다시 돌아와 내 귓가에 이명처럼 멤돈다. 내 앞에 고개를 숙인 정 대리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의 시간..
비즈니스 현장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무겁고도 비참한 정적(靜寂)이다. 평소 같으면 '자, 힘들겠지만 다시 방향을 수정해 봅시다'라며 분위기를 풀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내 안의 '화(火)'가 통제 장치를 뚫고 폭발해버린 뒤 남은 것은, 승리감이 아닌 지독한 자괴감뿐이기 때문이다.
'오늘 일은 그럴만 했다'라며 자위를 해보지만, 결국 지독한 후회만 밀려오는 순간이다.
'어느 날 한 뱀이 창고를 기어 다니다가 바닥에 놓여있던 톱에 몸이 스치며 상처를 입었다. 뱀은 톱이 자기를 공격했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뱀은 톱을 물었고 결국 뱀은 입을 심하게 다쳤다. 더 큰 상처를 입은 뱀은 화가 나서 복수를 다짐한다. 톱을 질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온 힘을 다해 톱을 휘감았다. 결국 뱀은 톱에 몸통이 베이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얼마 전 한 지인분이 전해 준 우화다. 맞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분노는 남에게 던지기 위해 뜨거운 석탄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상처를 입는 것은 오롯히 나다.
기획 초년병 시절의 일이다. 나름 밤을 새워가며 새로운 상품기획안을 열심히 준비해 가면, 꼭 ‘지난 프로젝트 결과’나 '과거의 리뷰'를 들먹이며 매번 딴지를 걸던 팀장님이 계셨다. 보고 때마다 돌아오는 그 집요한 피드백에 '차라리 그 시간에 다음 기획안 한 줄이라도 더 다듬는 게 낫지 않아?'라며 씩씩거렸던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상사 노이로제’라는 게 이렇게 오는 거구나 생각하며 속으로 수없이 화(火)를 삼켰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내 안에서 시도 때도 없이 끓어오르던 감정은 분노, 즉 '화(火)'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실력은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고, 열정만 가득 담긴 초보기획자의 거친 기획안을 검토하며 그 팀장님은 또 얼마나 많은 '화(火)'를 속으로 삭이셨을까 싶다. 내 안의 화만 생각했지 상대의 화는 생각하지 못했음을 시간이 한참 지나고 그 분의 입장이 되보고 나서야 깨닫고 있는 중이다.
기획이라는 일을 하다 보면 화를 낼 상황들이 참 많다.
회의 석상에서 내 아이디어가 무시되기도 하고, 열심히 만든 기획안이 한순간에 뒤집히기도 한다. 심지어 잘 팔리던 상품이 갑자기 클레임에 휩싸이기도 하는가 하면, 생각치도 않은 곳에서 사고가 터져 프로세스 전체가 엉망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순간들마다 마음속에서는 스물스물 화가 올라온다.
'왜 이렇게 일을 하지?'
'왜 이걸 이제 말하지?'
'왜 나만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지?'
그런데 이상한 사실이 있다. 화가 난 상태에서 만들어진 기획안은 대부분 끝이 좋지 않다. 왜냐하면 화가 난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누가 틀렸는지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기획은 누가 틀렸는지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맞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인데..
셰프에게 불(火)은 요리를 완성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도구다. 하지만 불의 온도를 다스리지 못하면 공들인 요리를 일순간에 새까맣게 태워버리고 만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마주하는 화(火)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꼬여버린 일정 앞에서 통제력을 잃고 폭발하는 화는 프로젝트를 잿더미로 만든다. 때로는 화도 필요할때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설계되지 않은 감정폭발은 '불량식품'과도 같다.
어떤 일에 '화'가 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프로젝트에 그만큼의 '애정'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일에는 화조차 나지 않는 법이니까. 때문에 오히려 그 뜨거운 에너지를 조정의 동력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기획의 완성도를 높이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화는 대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통제 불능의 상황이나, 타인을 향한 원망에서 비롯된다. 이는 남을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최고'라는 타이틀에 집착할 때 생기는 조급함과도 닮아 있다.
최고는 타인을 향하지만, 최선은 언제나 나 자신이 기준이 된다.
설계되지 않은 화는 조직의 분위기를 망치고 기획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화재'가 되지만, 잘 정제된 화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강력한 '엔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화를 내는 것과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 사이의 미세한 경계를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감정을 다스리고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지려는 그 집요한 과정들이 모일 때, 비로소 고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결과물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이성적인 결과물로 바꾸는데 도움이 나만의 노하우를 3가지 정도만 소개해볼까 한다.
1.'3초의 리드타임' 확보
물류에만 리드타임이 필요한 게 아니다. 감정에도 버퍼(Buffer)가 필요하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만 참아도 대부분의 화는 거를 수 있다. 딱 3초만 숨을 고르고 '침묵'의 시간을 가져보자. 놀랍게도 열 중 아홉은 화를 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현상과 본질의 분리(Objectification)
상대방의 실수에 화를 내기보다는, 그 실수가 발생한 '시스템의 결함'에 집중해야 한다. '왜 저 사람은 저럴까?'가 아니라 '왜 우리 프로세스는 저런 실수를 허용했을가?'로 질문을 바꿀 때, 화는 비로소 '개선책'이라는 인사이트로 바뀔 수 있다.
3.'냉정한 화(Cold Anger)'의 기술
세스 고딘이 말한 '위상(Status)'의 관점에서 볼 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리더는 순식간에 자신의 위상을 잃게 된다. 진짜 고수는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차갑고 예리한 논리로 상황을 압도한다. 감정을 걷어내고 팩트(Fact)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기획이라는 것은 수많은 인간관계와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서 최선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화'라는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를 '열정'이라는 자산으로 치환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리더이자 기획자가 될 수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어쩌면 예전에 나는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것을 에너지로 바꾸는 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분노는 남에게 던지기 위해 뜨거운 석탄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다'
- 쇼펜하우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