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0307.
모처럼 휴일을 맞아 집 근처 산책로를 걸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얼어있던 땅이 녹아 물기를 그득 머금고 있다. 아직 활량하지만 봄에 한껏 꽃을 피우기 위해 마지막 기지개를 펴는 나무들. 냇물은 녹아 어느새 '졸졸' 소리를 내며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닐 텐데, 때가 되면 얼음이 녹고,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저 물줄기를 보며 새삼스럽게 '자연의 순리(順理)'는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은 종종 과정에서 흘린 '땀'보다는 달콤한 '결과'를, '고통'보다는 '쾌락'을, '베이스캠프'보다는 '정상'을 먼저 정복하고 싶어 한다.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노력보다 결과를 먼저 기대하기 때문에 무모해지고, 탐욕스러워지고, 조급해지고, 때론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은 '봄' 다음 바로 '겨울'을 맞이하게 하는 법이 없다. 마치 자연은 우리에게 속삭이는 듯 하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기다림은 헛된 과정이 아니었다'라고..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순리'다.
'순리(順理)'
순종함' 혹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치'를 뜻한다. 세상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흐른다는 뜻인데, 쉬운 듯 참 어려운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도,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때가 되면 움직이고, 때가 아니면 기다리는 것.
어쩌면 순리란 ‘지금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먼저 보고,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새로운 물길을 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당겨 '숫자'로 증명해내야 하는 것이 기획자의 업(業)이다. 때문에 기획자의 하루는 언제나 '역행'과 '투쟁'의 연속이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이 업을 10년 넘게 이어오며, 사실 '순리'와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열정만 앞서던 시절. 나는 시장 상황이 받쳐주지 않아도, 소비자의 반응이 냉담해도, 내 기획이 '정답'이라는 확신 하나로 억지로 밀어붙이곤 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되게 만드는 게 기획이지!'
그렇게 억지로 물길을 틀어 만든 기획들은 당장은 눈앞의 성과를 낼지는 몰라도, 얼마 못 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물길을 억지로 바꾸면 결국 제방이 터지거나 물이 고여 썩기 마련 아니던가.
상품기획을 하다 보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이 많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한 상품이 기대만큼 반응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반대로 큰 기대 없이 시작한 프로젝트가 뜻밖의 성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좋은 기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빈틈없이 실행하면 원하는 결과는 반드시 따라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이가 들고 연차가 쌓이면서 깨닫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정말 '잘 팔리는 기획'은 의외로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억지로 고객을 설득하려 하지 않아도,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기획. 사람들의 욕망이 흘러가는 방향을 거스르지 않고, 그 물줄기에 슬쩍 징검다리 하나를 놓아주는 기획. 이것이야말로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기획. 좋은 기획이 아닐까 싶다.
마케팅 그루 세스 고딘은 그의 저서 <마케터는 새빨간 거짓말쟁이>에서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에 반하는 마케팅은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책에서 말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1.세계관은 이미 형성되어 있다
소비자는 마케터가 메시지를 전달하기 전에 이미 자신만의 믿음, 선입견,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2.그들의 믿음을 강화하라
사람들은 자신의 기존 신념을 확인해 주는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다. 그 신념에 반하는 마케팅은 무시되거나 저항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3.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성공적인 마케팅은 고객이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에 기반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4.변화의 핵심은 연결이다
마케팅은 무언가를 강제로 '파는 것'이 아니다.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들이 원하는 가치를 신뢰 관계 속에서 전달하는 것이다.
그는 강조한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 노력하기보단,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찾아내고, 그들을 위한 솔루션을 제공해야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그렇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비자들의 마음은 억지로 돌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이미 가고자 하는 방향을 읽어내고, 그 흐름에 나의 메시지를 태워 보내는 것. 기획자의 역할은 거대한 파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렁이는 파도가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그 흐름을 읽어낸 후 그 위에 서핑 보드를 올리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오해는 말자. 순리대로 한다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기다린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다하되 그 결과가 나타나는 '시간의 법칙'과 '세상의 흐름'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하고 싶은 뿐이다.
씨를 뿌리자마자 열매를 맺으라고 땅을 윽박지른다고 해서 사과가 열리지는 않듯, 기획자가 할 일은 좋은 씨앗(Idea)을 고르고, 적절한 땅(Market)을 찾아, 정성껏 물을 주며 때(Timming)를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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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든다면 '순리(順理)'라는 단어를 떠올려봐도 좋을 것 같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문다. 내가 아무리 붙잡아도 어김없이 밤은 오고, 또 아침이 오듯 세상은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은 조금은 조급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여백'을 담아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