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867. 원수불구근화 (遠水不救近火)

by 사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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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사람을 빌려와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수영을 잘 해도 자식을 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났는데 물을 바다에서 길어온다고 한다면, 바닷물이 아무리 많아도 불을 절대로 끌 수 없을 것입니다.(假人于越而救溺子,越人虽善游,子必不生矣, 失火而取水于海,海水虽多,火必不灭矣, 远水不救近火也)'

한비자(韓非子)에 설림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

‘먼 곳의 물은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한다.’

저 멀리 바닷물이 아무리 넘쳐난들, 지금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는 당장 내 손에 든 한 바가지의 물이 더 절실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먼 곳의 물'을 찾느라 정작 눈앞의 불길을 키우곤 한다.

'입고 상품 전량 표시사항 불량입니다. 이대로는 상품 출고가 불가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품질관리팀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6개월간 심혈을 기울인 신상품 론칭을 딱 하루 앞둔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깨알같이 적힌 식품표시사항. 원재료명 및 함량 부분에 치명적인 오타가 있었던 것이다.

'인쇄소에서 데이터를 넘길 때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패키징 재생산에만 최소 일주일이 걸리는 상황이었다. 패키징 재생산 비용과 그 기간 부담해야할 창고비는 차치하더라도, 론칭 성공을 위해 여기저기 쏟아부은 마케팅 예산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에 눈 앞이 깜깜해졌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론칭 일정 취소로 브랜드 신뢰도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곧바로 대책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어느때보다 무거웠다.

'론칭 취소합시다.'

CS팀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표시사항을 위반한 상품을 내보내는 건, 고객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브랜드 이미지와 고객의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어요. 막대한 보관 비용과 새로운 패키징 교체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패키징 재생산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브랜드 신뢰도를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마디도 틀린 말이 없었다. 완벽한 패키징, 정직한 표시사항, 고객과의 약속 그것들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라는데 반박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당장 방송 취소로 인한 위약금, 재고 보관 비용, 그리고 무엇보다 고객들이 느낄 실망감과 경쟁사의 반격 등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수 있는 솔루션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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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커 튜닝 합시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지금 물류창고로 우리 팀 전원 달려가겠습니다. 그리고 지원 가능한 인력 체크해서 지원 부탁드립니다. 틀린 부분만 수정한 스티커를 긴급 제작해서, 밤을 새더라도 스티커 튜닝 작업이라도 해보시죠.'

회의실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솔루션에 다들 아연실색 표정이 굳었다.

'패키지 사고에 대한 사과'를 담은 진솔한 안내 문구를 넣고, 절감된 비용만큼 차라리 고객에게 감사의 의미로 추가 구성품을 끼워주면 어떨까요?'

구성품을 강화하면 이익률은 떨어지겠지만 어차피 발생할 비용이었다. 고객이 진심을 받아들여주기만 한다면 론칭 일정을 지키면서 떨어진 신뢰도 회복할 수 있는 나름의 솔루션이었다.

결국 그날 우리는 아직은 차가운 3월의 밤바람을 맞으며 새벽까지 스티커를 붙여야 했다.

평생 잊지 못할 고생을 했지만 론칭 결과는 다행히 대성공이었다. 고객들은 스티커 작업이 된 패키징에 큰 불만을 갖지 않았고, 오히려 강화된 구성품에 크게 만족했다는 후기들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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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의 성패는 향후 3년 뒤 구축될 차세대 시스템에 달렸습니다.'

'지금 당장 매출이 안 나오는 건 시장의 구조적인 문제이니, 트렌드가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미래의 장밋빛 전망, 거대한 기술적 담론, 언젠가 이루어질 이상적인 시스템 등 뭔가 거창하지만 왠지 너무 먼 이야기들..

물론 기획자에게 멀리 보는 눈은 필수다. 하지만 당장 팔리지 않은 물건들이 창고에 쌓여만 가고, 고객들이 서비스의 불편함에 아우성치는 '근화(近火)' 상황에서 저 멀리 있는 '원수(遠水)'만 논하는 것은 기획자의 '직무유기'다.

기획일을 하다보면 당장 실행 가능한 소박한 대책보다는, 누가 봐도 감탄할 법한 거대하고 혁신적인 솔루션을 기획서 앞단에 배치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기획이 폼도 나고 품격도 있어 보이니까.

기획안을 올리면, '그래서, 당장 내일 아침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야?'라며 딴지를 걸던 팀장님이 있었다. 당시엔 그 질문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기획자의 창의성을 가로막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투박한 질문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팀장이 되고, 누군가의 성과를 책임지는 자리에 서 보니 알겠더라.

기획의 본질은 결국 '해결'에 있고, 가장 위대한 해결책은 '지금 당장 실행 가능한 가장 가까운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브랜드의 거대한 철학을 세우는 것(Identity)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 매장을 찾은 손님이 왜 인상을 찌푸렸는지, 웹사이트의 결제 버튼 위치가 왜 불편한지 같은 지극히 사소하고 가까운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도 기획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거창한 담론이라는 '먼 바다'로 나가기 전에, 내 발밑의 불부터 끌 줄 아는 융통성 말이다.

그렇다고 미래를 보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멀리 있는 물을 끌어오기 위해 수로를 파는 그 첫 삽질 역시

지금 내 눈앞의 흙을 파내는 '가까운 일'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물도 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기획자의 진짜 실력은 가장 먼 곳을 바라보면서도, 가장 가까운 곳의 불을 끌 수 있는 물 한 바가지를 언제든 내놓을 수 있는 용기에서 판가름 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화려한 성공 사례나,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미래의 기술적 환상에 눈을 돌리기보다 오늘 팀원들의 고민 한 마디, 데이터 속에서 발견한 작은 오류 하나에 더 집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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