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271. 비광 (雨光)

'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by 사마리아인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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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하루 한 개'의 글감을 선정해서 '글로 써보자'는 다짐으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어느 덧 70일을 넘기고 있다. 대단한 결과를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매일 매일 글감을 찾고 글로 써낸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작업임을 실감하고 있다. 늦은 야근이나 술 약속이라도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늘 하루는 건너 뛸까?'라는 유혹이 몰려온다. 어떤 날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억지로 컴퓨터 앞에 앉아 그 날의 숙제를 끝내고 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 순간들마다 '포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하는 일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고 그만 두거나, 대충하여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기회를 잃는 경우가 많다.


화투의 '비광(雨光)'.

화려한 꽃이나 달이 그려진 다른 광(光)들에 비해 유독 빗줄기가 쏟아지는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어수선하게 느껴진다. 버들가지 아래 우산을 쓰고 서 있는 선비, 그리고 그 발치에서 발버둥 치는 개구리 한 마리.

비광 속 인물은 일본의 서예가 '소야도풍 오노도후'로 공교롭게도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림을 얽힌 이야기는 더 흥미롭다.

서예가로 성공을 꿈꾸며 공부에 매진했지만 이렇다 할 진전이 없어 서예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길, 그는 비에 불어난 시냇물을 건너기 위해 버들가지로 뛰어오르는 개구리를 목격한다. 오노도후는 어림없는 일이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수십 번을 미끄러지고 떨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던 개구리는, 결국 바람에 휘어진 가지를 붙잡고 위로 올라가는 데 성공한다. 이를 본 그는 '한낱 미물도 목숨을 걸고 노력해 기회를 잡는데, 나는 저 개구리만큼 필사적으로 매달려 보았는가'하고 크게 깨우쳐, 다시 서당으로 돌아가 서예에 정진한 끝에 당대 최고의 명필이 되었다고 한다.


어릴 적엔 그저 '운 좋게 들어오면 점수나 높여주는 패'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 뿐 아니라 비광하면 솔직히 그리 환영받는 패는 아니었던 것 같다. 광이지만 비광이 낀 '비삼광'이 되면 2점으로 계산이 되서 게임을 끝낼 수도 없으니 허를 찌르는 '속공'이 불가능할 뿐더러, 차근차근 피를 모으는 전략에는 오히려 방해만 되니 전략짜기 여간 애매한 패가 아닌가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현장에서 기획자로 오랜 기간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이제는 이 작은 그림 한 장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기 시작한다. 비록 3장이 모이면 3점이 아닌 2점이 되지만, 한 장만 더 모여 '비사광'이 되면 4점이 되고, '오광'이라는 완성체가 되기 위해선 결국 비광 없인 불가능하다. 조금 모자란 듯, 때론 불필요한 존재로까지 느껴지기도 하지만, 완성을 위해선 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바로 비광이다. 이뿐인가 비광과 같은 달(12월)에는 특수 패인 '비쌍피'가 존재한다. 쌍피는 피 2장의 역할을 하므로, 피 점수가 승패를 가르는 고스톱에서 비쌍피를 선점하는 것은 상당한 전략적 우위를 가진다.

화투를 이용해 운수를 보는 '화투점'이라는 게 있다. 화투점에서 '비광'은 매우 길(吉)한 의미를 갖고 있다.

비광은 화투 48장 중 유일하게 '사람(오노도후)'이 직접 그려져 있는 패다. 때문에, 화투점에서 비광을 뽑으면 집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거나 나를 도와줄 '귀인'을 만나게 될 운수로 해석된다고 한다.

내가 화투 패 중 '비광'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사실 이 이야기를 접하고 난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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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라는 일도 어쩌면 '비광'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은 늘 화려한 '벚꽃(3광)'이나 '보름달(8광)' 같은 대박 기획을 원한다. 누가 봐도 근사하고,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혁신적인 아이템 말이다. 하지만 실제 기획의 현장은 비광 속 풍경처럼 늘 비가 내리고 어수선하다. 예산은 깎이고, 일정은 촉박하며, 협력사와의 조율은 비에 젖은 옷처럼 무겁기만 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마치 저 개구리처럼, 안 될 것 같은 기획안을 들고 수십 번씩 의사결정권자의 문을 두드린다. 미끄러지고, 깨지고, '이게 되겠어?'라는 냉소 섞인 피드백을 들으면서도 다시 뛰어오르는 일. 쏟아지는 변수 속에서 어떻게든 '버들가지(기회)'를 붙잡아 채는 능력이 기획자의 진짜 실력이 아닐까 싶다.

흥미로운 점은 화투 게임에서 비광의 취급이다. 비광은 광(光) 대접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피(皮)'로 취급되기도 한다. 가장 화려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장 낮은 곳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셈이다. 기획자도 그렇다. 전략을 짤 때는 화려한 광의 옷을 입지만, 정작 실행 단계에 들어서면 물류 창고에서 스티커를 붙이고(피의 역할), 엑셀 시트와 사투를 벌이며 가장 낮은 곳의 일을 묵묵히 해내야 한다.

가끔 후배들에게 '기획자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요?'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비광을 떠올린다. 비광이 광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비바람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며 판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의 일을 할 줄 모르는 기획자는 결코 가장 높은 곳의 전략을 완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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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도 실력의 일부'라는 말이 있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행운마저 뒤 따른다는 의미로 지어진 말일테다.

'아! 어리석은 건 개구리가 아니라 바로 나로구나! 한낱 미물에 불과한 개구리도 목숨을 다해서 노력한 끝에 한 번의 우연한 기회를 자기 행운으로 바꾸었거늘 나는 저 개구리처럼 노력은 안 해보고 이제껏 불평만 늘어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오도노후의 깊은 깨달음처럼, 나 역시도 '남의 행운만을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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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실패하고 실패해도 다시 뛰어오르는 사람을 당할 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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