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334. 마니또 'Manito'

'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by 사마리아인

0203.



달력을 보니 2월3일. 마지막 절기인 대한(大寒)의 마지막 날이자, '절기력'의 첫 절기 입춘(立春)의 전날이다.

입춘을 맞이하는 풍속 중에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다.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 입춘 전 날 밤 남몰래 다른 사람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풍습이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한 해 동안 나쁜 일을 떨칠 수 있다고 믿었다. 좋은 일을 하면 행운이 따라온다는 믿음이다.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는 실력뿐만 아니라 '운(運)도 관리하는 선수'로 유명하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든 인생 계획표(만다라트)에는 '운'이라는 항목이 존재한다. 심지어 이를 높이기 위한 행동들까지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오타니가 말하는 '행운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중 한 가지가 쓰레기 줍기다. 실제로 오타니는 길가다 쓰레기가 보이면 자주 줍는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가 한 인터뷰에서 '다른 사람이 버린 운을 줍는 것'이라고 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시다.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막내 시절 팀 송년 워크샵 행사진행을 맡은 적이 있다. 매년 하는 연례행사지만, 평범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며칠 밤을 고심했다. 장기자랑, 퀴즈게임, 럭키박스 등등 선배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건 좀 아닌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 교실 안을 설레게 했던 ‘마니또’ 게임이 기억났다. 내 마니또의 책상 서랍에 몰래 사탕 하나를 넣어두고, 들킬까 봐 가슴 졸이며 멀리서 지켜보던 그 순수했던 시절. 그 때의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선배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나는 곧바로 송년회 행사 기획안에 '마니또 공개 및 감사 선물 증정' 순서를 넣었다.

'마니또(Manito)'는 이탈리아어로 '비밀 친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는 송년회 D-2주전 사전 공지를 한 후 추첨을 통해 각자의 '비밀 친구'를 짝지어주었다. 2주라는 시간이 지나고 송년회 당일. 당초 기획했던 퀴즈게임, 럭키박스 등의 행사도 모두 진행되었지만 가장 뜨거운 반응을 끈 코너는 단연 '마니또 발표와 감사 선물 증정'이었다. 내 비밀 친구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묘한 재미와 긴장감이 돌았고, 지난 2주간 몰래 관찰하며 알게 된 내 마니또의 느낌과 소감을 말하는 과정에서는 묘한 감동과 뭉클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연말 분위기와 맞물려 동료애의 따듯함을 더한 것은 덤이었다.


'마니또(Manito)'의 규칙은 단순하다.
티 내지 말 것.
대가를 바라지 말 것.
끝까지 들키지 말 것.

돌이켜 보면 그건 꽤 이상한 구조다. 칭찬도 받을 수 없고, 고맙다는 말도 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팀원들은 꽤 즐겁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

왜였을까?

아마도 선행이라는 행위를 통해 ‘내가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보상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결국 '마니또(Manito)'의 본질은 ‘나인 것을 알리지 않고 베푸는 친절’에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상상해 본다.

우리가 하는 기획(Planning)이라는 행위 자체가 고객이라는 비밀 친구를 향한 '거대한 마니또 게임'이 아닐까?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의 킥은 '남이 모르게'라는 포인트에 있다. 덕의 가장 고귀한 형태로 ‘음덕(陰德)’을 꼽는다. ‘숨을 은(陰)’에 ‘덕 덕(德)’. 즉, '남이 알지 못하게 베푸는 덕'을 최고로 친다는 얘기다.

사실 상품기획자의 업무 중 9할은 이 ‘음덕’을 쌓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객은 우리가 원단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공장장과 며칠을 싸웠는지 잘 알지 못한다. 상품의 상세페이지에서 단어 하나, 이미지 한 컷의 톤을 맞추기 위해 기획자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정확히는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 맞다.

그럼에도 ‘비밀 친구’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성껏 쌓아 올린 그 작은 배려들은, 결국 고객이 상품을 손에 쥐는 순간 ‘왠지 모를 만족감’으로 발현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 몰래 숨어 내가 기획한 상품과 서비스로 고객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남 몰래 흡족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상품기획자의 숙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객이 나의 친절을 몰라도 괜찮다.

오늘 하루도 나는 누군가의 마니또로 살아볼까 한다.

기획의 미학은 ‘생색내지 않는 집요함’에 있으니까.




'기획은 설득이고, 설득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미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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