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828. 춘화작용(春化現象)

'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by 사마리아인

0128.


새해의 시작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월도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침 출근길, 여전히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다 발걸음을 멈춘다. 가로수 가지 끝에 올망졸망 맺힌 ‘겨울눈’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지난 '소한' 편에서도 언급한 적 있던 '겨울눈'이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야무지게 여문 모습에 눈길이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곧 봄이 오겠구나'

그 작은 봉오리 속에 봄의 설계도를 통째로 집어넣은 채 혹한을 견뎌내고 있는 저 생명력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춘화현상(春化現象)’이라는 단어가 있다.

'춘화현상'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꽤나 낭만적인 단어라고 생각했다.

‘봄 춘(春)’, ‘될 화(化)’.

단어 자체가 주는 운율이 아름답기도 했고, ‘봄으로 변화한다’는 뜻이라니 왠지 모르게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뜻을 알고 나선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던 단어 중 하나다.

춘화현상이란 식물이 일정 기간 추위를 견뎌야만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는 상태로 전환되는 과정을 말한다.

혹한이라는 통과의례를 견뎌내지 못한 씨앗은 아무리 햇볕이 좋아도 꽃을 피우지 못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를 일전에 본 기억이 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한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고 호주의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 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엔 첫 해라 적응하느라 그런가 보다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꽃은 피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를 찾아보니 이는 '춘화현상' 때문이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 서는 개나리꽃이 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리나 밀 같은 식물들 또한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겪지 않으면.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잎만 무성하게 자라다 사그라진다고 한다.

추위를 겪지 않으면 꽃을 피울 수 없는 것이 식물의 숙명인가 보다.

상품기획자로 살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과 어우러져 협업을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오만가지 유형의 사람들과 엮일 일이 많은데, 종종 ‘혹한의 겨울’을 겪지 못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운 좋게 시장의 흐름을 잘 타서 일수도 있고 혹은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수혜를 입어 소위 '어깨뽕' 이 잔뜩 들어간 경우도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경우,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이 하나 있다. 하나 같이 작은 성공에 취해 '오만(傲慢)'이라는 덫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거 제가 다 기획한 거예요.'

'요즘 트렌드는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회의실 천장을 뚫을 듯 높고, 시선은 늘 구름 위에 머무는 듯하다. 실체가 없기에 왠지 모를 '공허함'마저 느껴진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다인냥 자만의 늪에 빠지는 이들. 주변의 진심 어린 조언을 ‘꼰대의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며 배움에 게으른 이들. 결국 추위를 견디며 뿌리를 깊게 내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핀 꽃은, 작은 가뭄이나 예기치 못한 비바람에도 속절없이 꺾이고 만다.

이들을 보며 ‘춘화(春化)’되지 못한 꽃이 생각나는 이유다.

진짜 실력 있는 기획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란 솔직히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적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힌트는 얻을 수 있다.


실패의 쓴맛을 보고, 밤새워 쓴 기획안이 반려되는 수모를 겪으며, 엑셀 시트 한 칸의 오류를 잡기 위해 눈이 충혈되도록 모니터를 노려 본 시간들. 그 혹독한 ‘겨울’을 묵묵히 견뎌낸 이들의 내공은 단단하다.

진짜 고수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자신의 성공이 운과 시스템, 그리고 수많은 협력자들의 헌신 덕분임을 잘 알기에 그들의 언어에는 늘 ‘우리’와 ‘덕분에’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16년 차 베테랑 상품기획자지만, 나에게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온다. 매출이 곤두박질 칠 때, 기획 의도가 시장에서 오독(誤讀)될 때, 지독히도 운이 따라주지 않아 엉뚱한 결과가 도출될 때. 고통과 감내의 시간들은 늘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춘화(春化)'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지금 혹시 작은 성취에 취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지는 않은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본질을 닦고, 나의 오만을 경계하며 겸손의 근육을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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