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0214.
어느덧 긴 설 연휴의 시작날이다. 평소보다 늦은 설이라 그럴까?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雨水)'가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한껏 기승을 부리던 혹한의 추위도 한풀 꺾이고, 겨우내 단단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모든 '해빙(解氷)'이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땅이 녹으며 감춰져 있던 작년의 해묵은 잔해들이 진흙탕처럼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새해가 되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들 속에서, 2월에 맞이한 설연휴가 내게는 반성과 회고의 기회로 느껴진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 동안 그간 아쉽고, 미흡했던 점에 대한 냉정한 반성의 시간은 분명 미래에 좋은 영향분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중국 후한 시대에 맹민(孟敏)이란 사람이 살았다. 맹민은 산동(山東)의 거록(巨鹿) 지방 출신으로 태원(太原) 땅에서 타향살이를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시루를 등에 지고 길을 가던 길에 실수로 시루를 땅에 떨어뜨려 깨뜨리고 말았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荷甑墮地, 不顧而去). 이 모습을 지켜본 곽태(郭泰)라는 군자가 신기해 물었다.
'이보게. 자네 시루가 떨어져 다 깨졌는데 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가?'
'알고 있습니다. 허나 시루는 이미 깨졌는데 돌아보면 무엇합니까'
'破(깨뜨릴 파), 甑(시루 증), 不(아닐 불), 顧(돌아볼 고)' 깨진 시루는 돌아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고사가 바로 '파증불고(破甑不顧)'다.
말 그대로 지나간 일이 지나간 대로 인정하고 그냥 살아가라는 고사다.
살다 보면 과거의 실수나 기회를 놓친 것을 자책하거나 아쉬워할 때가 많다.
하긴, 내 의지와는 반대로, 내 뜻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날 때가 얼마나 부지기수로 많은가. 이미 잘못된 것을 아쉬워해 봐야 내 복장만 터진다.
그렇다고 과거를 외면하란 얘기는 아니다. 냉정한 반성의 시간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말일테다.
'파중불고(破甑不顧)'.
이 짧은 문장은, 새 시즌을 앞둔 기획자인 내게 그 어떤 화려한 전략보다 냉정한 깨달음을 준다.
1.이미 깨진 것은 깨진 것으로 인정하자
기획자로 살다 보면 수많은 ‘깨진 항아리’를 마주한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준비했지만 소비자들의 냉담한 반응에 절망했던 캠페인, 몇 달을 공들여 출시했지만 시장의 외면을 받아 사라져 버린 상품,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날려버린 기회의 순간들. 아마 나뿐 아니라 많은 기획자들이 이 깨진 파편들을 부여잡고 '왜 그랬을까', '이렇게 했었으면'이라며 자책의 시간을 보내봤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기획의 시선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해 흘러야 한다.
2.'매몰 비용(Sunk Cost)'을 고려하라
상품기획 현장에서 '파중불고'가 가장 절실한 순간은 바로 '손절(Stop-loss)'의 타이밍이다. 이건 10년 차 이상의 베테랑 MD들도 종종 범하는 실수다. 자신이 기획한 아이디어에 과도한 애정을 쏟은 나머지, 모든 데이터와 지표들이 '실패'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이를 외면한 채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결국 효율이 나지 않는 일에 예산, 시간, 노력을 계속해서 투입하며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모두가 보는 걸 왜 보지 못할까'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이때 고려해야 하는 것이 '매몰 비용(Sunk Cost)'이다. 이건 리더의 과감한 결단과 개입도 필요하다. 사실 팀장으로서도 그간 팀원의 노고를 생각하면 프로젝트를 접는 결정은 쉽지 않다. 하지만 깨진 항아리를 고쳐 쓰려다가는 더 큰 비용과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공감대는 필요하다. 기획의 성패는 '무엇을 시작하느냐'보다 '무엇을 제때 포기하느냐'에서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3.파편 속에서 길을 찾아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실패에 대한 무조건적인 '외면'과 '무책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실패와 오류에 매몰되지 않되, 왜 깨졌는지는 반드시 몸에 새겨야 한다. 항아리를 지고 가던 자세가 잘못되었던 건지, 아니면 항아리 자체가 부실했던 것인지 짧고 굵게 복기해야 한다.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MD는 B급.
한 번의 실패를 다신 반복하지 않는 MD는 A급.
과거의 실패를 '자산화'하는 MD가 S급이다.
긴 설연휴가 지나면 2월도 마지막 한 주 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새로운 S/S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3월이 되면 '봄의 전장'이 상품기획자들의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새로운 성공의 기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마음속에 여전히 작년의 실패나 지난달 부진의 기억들이 '깨진 항아리'처럼 덜렁거린 채 남아 있다면, 과감히 외면한 채 고개를 돌리자.
어차피 깨진 항아리는 다시 붙여도 예전과 같은 소리는 내지 못한다.
그 대신 우리는 더 단단하고 더 아름다운 새 항아리를 기획하면 되니까.
'회의에 빠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단, 회의에 빠지되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루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