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253. 왕과 사는 남자

'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by 사마리아인

0222.


지인의 강력한 추천으로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역사 속 비운의 왕 '단종'을 소재로 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다. 수양대군과 단종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기존 작품들이 워낙 많았기에 별 기대 없이 본 영화였지만,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할 정도로 오랜만에 진한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어찌 보면 결말을 이미 알고 보는 뻔한 소재임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어찌 이리도 깊은 여운을 주는 것일까?

기획자의 시선에서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1.'감독 장항준'의 재발견

엔딩크래딧에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을 맡은 '장항준'이다. 사실 내 기억 속에 그는 감독보단 예능인으로서 이미지가 강하다. 스타 작가 '김은희 남편'이란 수식어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도 많을 듯하다. 그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소위 '잘 나가는 와이프'와 빗대어 부족한 자신의 처지를 위트 있게 포지셔닝한 이유가 클 테다.

내 기억 속엔 그의 작품 중 기억에 남는 영화가 별로 없다. '라이터를 켜라', '끝까지 간다' 같은 킬링타임용 영화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이번 영화만큼은 대중의 뇌리에 '감독 장항준'이란 이름이 깊숙이 박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는 '어차피 지는 싸움에 기꺼이 투신하는 언더독(약자들)' 이야기를 다루는 데 익숙한 감독이다. 그의 과거 작품 '리바운드'에서는 최약체라 평가받던 아웃사이더 농구팀 부산중앙고 이야기를 다뤘고, '라이터를 켜라'에서는 백수건달 허봉구(약자)와 조폭 보스(강자)와의 대결구도를 통해 '개미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메시지를 유쾌하게 그려낸 바 있다.

이런 그가 '수양대군과 단종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 그 속에서 '엄흥도'라는 의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작품을 만난 것이다. 거대한 권력 앞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단종'과 그의 옆에서 묵묵히 의리를 지키는 '엄흥도'라는 인물의 이야기는 그가 가장 잘 다루는 이야기 전개방식이자 소재다. 역시 사람은 내가 가장 잘하는 걸 할 때 빛이 나기 마련이라는 걸 다시금 느낀다.


2.탁월한 캐스팅과 캐릭터 활용법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이 아닐까 싶다. 유해진 배우가 연기 잘하는 사람이라는 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저리도 슬픈 비극을 잘 연기하는 배우였나?'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다.

그는 영화의 초중반부까지 본인 특유의 유쾌함과 피지컬을 바탕으로 타율 높은 코미디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절망에 빠진 어린 왕 단종과 유쾌한 촌장 엄흥도가 만나면서 발생하는 캐미들은 그의 전매특허였기에 관객들은 쉽게 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부터 발휘되기 시작한다. 그간 그가 보여준 역할들이 코믹한 역할들이 많았기에, 과연 그가 이토록 무거운 비극까지 완벽히 소화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무렵. 그는 관객들의 폭풍 오열을 이끌어내는 폭발적인 열연을 펼친다. 자칫 억지스러운 과한 신파로도 느껴질 수도 있는 장면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역시 유해진 배우의 연기가 제대로 빛을 발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코미디라는 강한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그의 진짜 연기력이 이번 작품을 통해 제대로 빛을 발했다는 평이 많던데, 나 역시도 공감하는 바가 컸다. 이렇다 할 스캔들 하나 없이 갈수록 빛이 나는 배우인 걸 보면 역시나 그는 '찐'이구나 싶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찐들이야말로 진짜 멋있다'는 생각을 한다.

단종 역을 맡은 박지훈 배우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젊은 배우를 어디서 봤더라?' 생각했더랬다. 알고 보니 '약한 영웅'이라는 드라마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배우였다. 학폭에 맞서는 비운의 캐릭터 역할을 맡아 열연했는데, 그때도 특유의 '눈빛이 참 기억에 남는 배우'란 생각을 했었다. 극중 보여지는 그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가 왜 단종 역에 캐스팅되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3.정서를 극대화한 세심한 연출과 강력한 클라이맥스

'왕과 사는 남자'의 작품 구성을 살펴보면

1.뜻밖의 만남(기)

2.깊어지는 유대감(승)

3.갈등의 고조(전)

4.비극적 결말(결)

'새드엔딩'의 전형적인 '기승전결' 플롯이다.

영월 산골 마을인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유해진)는 이웃 마을(노루골)처럼 좌천된 고위 양반을 모셔와 마을을 풍족하게 만들 속셈으로 자기 마을을 유배지로 지정받게 만든다. 하지만 부푼 꿈을 안고 맞이한 유배자는 돈 많은 양반이 아니라 권력을 잃고 쫓겨난 16세의 소년, 노산군 이홍위(박지훈)였다.

모든 것을 잃고 삶의 의지마저 놓아버린 이홍위는 절벽에서 투신하려 하지만, 유배자가 죽으면 마을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엄흥도가 그를 간신히 살린다. 이번에는 반대로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위협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홍위가 마을 사람들을 구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연다. 이후 이홍위와 엄흥도, 광천골 사람들은 깊은 유대감을 쌓아간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권력자 한명회(유지태)의 등장으로 극 중 분위기가 뒤바뀐다. 단종은 고민 끝에 금성대군이 계획한 '거사'에 가담하기로 결심하며 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복위 거사'는 한명회가 미리 파놓은 함정이었다. 거친 비가 내리는 밤, 엄흥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홍위는 뜻을 굽히지 않고 나섰다가 붙잡히고 만다.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영화는 끝이 난다.

역사 속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만큼 결과를 알고 보는 뻔한 장면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새 눈물이 흘렀다. 역시나 극 전체를 관통하는 치밀한 복선과 세심한 연출. 압도적인 클라이맥스가 주는 감동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이홍위와 엄흥도가 빗속에서 마주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더 이상 나로 인해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단종에게

'그 안에 나도 있습니까?'라고 묻는 엄흥도에게 단종은 되묻는다.

'그대는 아닌가..'


4.친숙한 역사적 사건과 살짝 비틀기

이 영화는 대중에게 익숙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소재로 다룬다. 계유정난은 조선 제7대 왕 세조(수양대군)가 어린 조카 단종(제6대 왕)의 보좌 세력인 황보인,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정권과 병권을 찬탈한 뒤 단종을 몰아낸 쿠데타를 말한다. 1453년 계유년 11월 10일에 일어난 난이라 해서 계유정난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워낙 극적이라 여러 작품의 소재로 쓰인 바 있다. 그만큼 '믿고 보는' 이야기 소재인 셈이다.

이 영화는 '계유정난'이란 익숙한 소재를 사용했지만, 사건 당일의 참극보다는 권력을 잃고 쫓겨난 어린 왕 단종의 시선과 유배지 생활에 집중하는 신선한 접근법을 보여준다. 때문에 영화의 전반부 분위기는 관객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리는 대반전을 연출한다. 암울한 분위기의 비극을 예상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전반부에 느끼는 감정은 '유쾌, 상쾌, 통쾌' 그 자체다. 극장 여기저기서 박장대소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단종, 한명회, 수양대군 같은 역사 속 주인공이 아닌 역사 속 단 한 줄 기록이 전부인 촌장 '엄흥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 역시 관객으로 하여금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엄흥도라는 인물을 통해 관객은 단순히 '단종의 죽음'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경험을 한다.

비록 잘못된 역사였지만, 240년이 흐른 뒤 정식으로 복위된 '단종'과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세조의 끔찍한 엄명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한밤중에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묘를 쓴 엄흥도 역시 '공조판서'에 추대되는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기획자의 시선에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소재 발굴, 캐릭터 구축, 타겟팅 및 마케팅 전략 등에서 훌륭한 레퍼런스로 다가온다. 그중 몇 가지만 노트해 본다.

1.익숙한 소재의 비틀기 전략

'익숙함'이란 토대 위에 '살짝 비틀기' 전략은 마케팅의 교과서의 단골 소재다. 실패 확률이 매우 낮은 높은 타율의 전통적 마케팅 기법이다. 이 영화는 대중에게 매우 익숙한 역사적 사건인 '계유정난'을 다루되, 쿠데타의 과정이나 한양에서의 정치 싸움이 아니라 '유배지'라는 다소 독특한 장소에서 이야기라는 비틀기 전략을 사용했다.

역사에 단 한 줄 남은 '왕의 시신을 묻어준 남자'라는 기록을 토대로 기획자의 상상력을 더해, '왕과 삶을 함께한 남자'로 서사를 확장하며 '죽음'의 역사를 '삶'의 이야기로 전환시켰다. 탁월한 기획력이다. 같은 기획자로서 꼭 한번 만나 한 수 배우고 싶은 심경이다.

2.아이디어나 소재가 아니라 '디테일'

단종의 비극적인 최후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결말이 정해져 있기에 쉽게 다루기 어려운 소재다. 때문에 보다 치밀한 구조의 설계와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세밀한 연출이 필수다.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대박이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관객의 몰입도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바이럴 효과는 덤이다. 최근 비슷한 성공 사례로 최근 '서울의 봄'도 있다.

소위 '대박 아이디어와 소재'만 쫒는 우를 범하는 기획자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아이디어나 소재가 아니라 디테일이라는 걸 증명하는 듯하다.


좋은 기획이란 뭘까?

일전에도 이 질문을 던진 적이 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삐까번쩍 기깔나고 새끈한 기획'이라고 답한다.

요즘 기획일을 한다는 사람들은 만나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요즘 뜨는 것', '트렌드', '시의성 있는 소재'를 쫒는 것을 본다. 하지만 모두가 해당 이슈를 똑같이 다루는 순간, 더 이상 그 이슈는 이슈가 아니게 된다.

'딜레마(Dilemma)'의 순간이다.

그렇다.

뻔한 소재로도 훌륭한 이야기와 결과물을 도출해 낼 수 있어야 '좋은 기획'이다.
그럴 수 있어야 '좋은 기획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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