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주 워킹홀리데이 첫날, 나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첫날 호스텔 근처 중국 음식점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동양인 아주머니가 카운터 의자에서 일어나며 내게 물었다.
“익힝오테컹웨?”
“네?”
나도 모르게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익힝오테컹웨?”
처음 들어보는 억양과 표현이었다.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 주문 같았다. 나는 일단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익힝오테컹웨?!”
하지만 “웃으며 고개 끄덕이기” 스킬은 상대방의 말이 질문이 아닐 때만 쓸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네 번째에 결국 인내심을 잃고 극대노를 시전했다.
“익힝오테컹웨!!!”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호주에서의 첫날, 나는 식당에서 처음 본 아주머니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Eat in or take away?’, 내가 먹고 갈 건지, 포장할 건지, 물어본 것이었다.
20대 초반 나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비포 선라이즈”, “인투 더 와일드” 등 수많은 여행 영화를 보며 여행에 대한 로망을 키워갔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 함께 우정을 쌓고, 또 사랑에 빠지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단 한 번 뿐인 인생을 평생 한국에서만 살다가 죽을 수는 없다. 우물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영감을 주고받자!
아쉽게도 가방 하나 들고 훌쩍 떠나는 낭만의 청춘 여행은 내 선택지에 없었다. 그 당시 나는 군대 휴가를 나와서 잘 곳도 제대로 없었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무작정 여행에 돈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군대 전역 후 6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위해 400만원을 모았다. 워킹홀리데이 동안 내 유일한 목표는 바로 400만원을 그대로 복구하여 귀국하는 것이었다. 워킹홀리데이를 마친 후 한국에서 쓸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해외에 머물며 동시에 돈을 벌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호주로 떠났다.
다른 친구들이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스펙을 쌓고, 안정된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동안, 나는 브리즈번에 있는 허름한 호스텔 공용 식당에 앉아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씹어 먹으며, 어떻게 하면 최대한 오래 호주에서 여행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호주에서의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최대한 돈을 아끼기 위해 거의 매일 식빵만 먹으며 살았지만, 숙박 비용 때문에 어느새 통장 금액은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일을 구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곧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을 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영어였다.
학창 시절 내 영어 실력은 바닥이었다. 거의 전교 꼴찌나 다름없었던 나는 매일 학교에 강제로 남아 방과후 영어 보충수업을 받아야 했고, 심지어 그 최하위권 그룹에서도 단어를 외우지 못하거나 문법을 이해하지 못해 끝까지 남아 있었다.
영어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내게 질문할까 봐 아픈 척 연기까지 했을 정도로 영어가 무서웠다. 선행 학습으로 이미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다른 친구들과 비교가 되어 더욱 부끄러웠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6개월 동안 공부해서 나온 토익 점수가 575점이었다. 심지어 ‘Child’의 복수가 ‘Childs’가 아니라 ‘Children’이라는 사실은 호주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편입 준비를 하며 알았다.
호주에 가기 전 영어가 문제가 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음식 주문 같은 간단한 의사소통조차 안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첫 날 있었던 중국집 익힝오테컹웨 사건은 처참한 내 영어 실력을 깨닫게 해 주었다.
첫 한 달 동안 나는 호스텔을 옮겨 다니며 최대한 영어를 써보려 애썼다. 하지만 대화는 늘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끊겼다. 상대가 웃으며 뭐라고 말을 이어가면, 나는 그저 어색하게 따라 웃기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말도 못 알아 듣는데 성가시게 계속 말을 거는 내가 뭔가 민폐처럼 느껴졌다.
호스텔 공용 식당에서도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테이블을 피해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다. 휴대폰 화면을 괜히 몇 번이나 켰다 껐다 하며 바쁜 척을 했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는 막 만난 사람들끼리 맥주를 부딪치며 웃었고, 나는 속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우울함에 빠져 시간을 버린 건 절대 아니었다. 혼자서 나름 브리즈번 곳곳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알차게 여행했기 때문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했고, 길거리 트럭에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며 짧은 영어 한 문장을 성공할 때마다 괜히 뿌듯했다.
특히 저녁노을이 질 때가 좋았다. 이상하게도 호주에서의 노을은 한국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진하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혼자 가만히 하늘만 보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알차게 해외여행을 했기 때문에, 이대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크게 아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가지고 온 돈이 반이 남았으니, 뭔가 또 다른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브리즈번에서 여행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호주에 더 오래 머물려면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거나 아니면 아예 돈을 쓰지 않아야 했다.
일상적인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 영어 실력으로 카페 일자리 같은 현지 로컬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우선 한인잡이 있었다. 아무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니 영어에 대한 압박이 적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단지 호주에 최대한 오래 머물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인들과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외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한국인이 아닌 다른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원래 취지와 멀어지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공장이나 농장이라는 옵션도 있었다. 아무래도 육체적 노동을 하는 곳은 영어가 덜 중요할 것 같았다. 외국인 친구를 사귈 기회도 한인잡보다 많을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친구들에게 ‘멸치’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나는 육체노동을 할 자신이 없었다. 군대에서도 가까스로 체력 검사를 통과할 정도로 저질 체력이었다. 그런 내가 공장과 농장에서 하루 종일 육체노동을 하는 건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보통 공장과 농장은 외곽에 위치해 있어 자동차가 필수인데, 나는 운전면허도 없었다.
결국 어느 정도 영어를 쓸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려면 일단 영어 실력을 최소한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까지는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고정 비용으로 나가는 숙박비가 문제였다. 그 당시 저렴한 호스텔의 숙박 비용이 1박에2만 5천원에서 3만원이었는데, 한 달에 거의 백만원 가까운 돈이 빠져나갔다. 호스텔에서 한 달 더 머무른다고 해서 영어 실력이 기적처럼 갑자기 늘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매일 밤마다 방에서 시끄럽게 섹스하는 사람들 때문에 잠에 설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나는 “돈을 쓰지 않는 방법”을 생각했다. 숙박을 무료로 해결하는 동시에 영어 실력을 최대한 빠르게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상에 도대체 누가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며, 영어 공부까지 시켜주겠는가?
그렇게 나는 마틸다 아주머니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