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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봄 Apr 22. 2020

숨어버린 만년필

써야 할 글을 쓰지 못하는 핑계

숨어버린 만년필 (초고)


출판사 대표님께 호기롭게 약속했던

마감일은 다가오나 만년필이 사라졌다


쓰여진 글은 부끄러운 수준이고

쓰고 있는 글은 억지덕지 이어붙인 누더기에

써야 할 글은 마주하지도 시작하지도 못하고

독자에게 밥이 될만한 글은 쓰여지질 않다보니

작가의 편견과 답답한 심경만 끄적이고 있다


어느 날 부턴가 글이 막히더니

한 줄도 끄적이지 못한 날이 이어지니

게으르고 무책임한 작가놈에 실망한건지

수년간 함께 해온 만년필이 사려져 숨어버렸고

이를 핑계삼아 오늘도 글다운 글 한 줄 못쓰고 있다





2020. 4. 22

만년필을 잊어버린 질문술사 시인박씨

그래도 아직 한 자루의 루미 만년필은 남아있.....
詩足 _ 만년필과 글쓰기

  ‘종이 위에 직접 글을 쓰는 것’과 ‘손가락 두드려 글을 쓰는 것’ 사이에서 종종 무엇을 택해야 하나 고민한다.  손가락을 두드려서 컴퓨터로 원고를 쓰면 부끄러운 표현을 수정하기 용이하다. 종이 위에 쓰는 방식은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느리게 쓰면서, 내가 쓴 글들과 호흡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둘 다 일장 일단이 있으니, 요즘엔 먼저 종이를 꺼내 붓펜이나 만년필을 붙잡고 끄적끄적 쓰다가, 손가락으로 타닥타닥 옮기며 고쳐 쓴다.

두꺼운 펜촉으로 끄적이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필통엔 늘 두 종류의 만년필을 넣고 다닌다.  펜촉의 두께는 1.1mm나 1.5mm를 즐겨 사용한다. 두꺼운 굵기로 쓰다 보면, 빠르게 쓰기 어렵고, 자연스럽게 글 쓰는 속도도 느려진다. 두꺼운 펜촉의 만년필로 글을 쓰다 보면, 빠르게 살아가는데 지친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잉크는 리필식을 주로 쓰고, 바다색 잉크를 애용하는 편이다. 검정이나 파랑보다 산뜻한 느낌을 준다.

 며칠 전부터 만년필 한 자루가 보이질 않았다. 선물 받은 것은 아니고, 내 지갑을 열어서 직접 구매했던 첫사랑 같은 놈인데, 드디어 집을 나가 숨어버렸다. 필통엔 여전히 수많은 필기구가 있지만, 사라진 만년필을 핑계 삼아 오늘도 책 원고 쓰는 일은 뒷전으로 미뤄버리고, 옹알이 같은 잡글만 몇 자 끄적였다.

조금 더 솔직 혹은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독자를 위한 글을 쓰지 못하는 나날이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다. 세 번째 책을 펴내기엔, 그동안 써 둔 글들은 양도 빈약하고, 질은 더 형편없다. 간결하게, 독자를 위한 글을 쓰는 작가들이 늘 부럽다. 물론 그들도 여전히 고민하고, 쉼 없이 끄적이고, 다시 또 고쳐 쓰는 지난한 여정을 거쳤을 것이다. 남이 하는 일은 쉬워 보이고, 내가 하려고 하면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되곤 한다.

_____ 만년필 하나 잊어버렸단 사실을, 실성한 사람처럼 구시렁거리며 참으로 길게 늘여 쓰고 있다.
#너때문에 #나태주 #마음이살짝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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