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02. 껍질 벗고 태어난 위태로운 삼봄씨 이야기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나의 어두운 시기가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_ 베드로시안 <그런 길은 없다>
봄앓이
2020. 11. 12.
낡은 이름 버리고
태어난 지 둘째 날
삼봄씨 이야기
제가 동굴에 숨어 무슨 일을 하고 있냐면, 저를 죽이고 있지요. 아니 이미 며칠 전에 저라고 수십 년 동안 믿고 있던 중요한 역할자기 하나를 때려 부셨어요. 자아정체성이 크게 흔들리고 있고, 그래서 많이 취약해져 있고, 스스로를 돌보고 치유하는 작업으로 걷고, 숨 쉬고, 생각하고, 글 쓰며 머물고 있어요. 처음 생각보다 이 작업이 꽤 길어지고 있어서 내심 당황하고 있기도 합니다. 얼마나 저를 먼저 돌봐줘야 할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그냥 그렇단 이야기입니다.
#중심자기 그리고 #주변자기
(자아정체성과 역할정체성에 관한 메모)
- 자아는 스스로에 대한 독특한 신념체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 즉 자아정체성이라고 해보자.
- 우리는 삶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외부로부터 부여받고 받아들이거나, 혹은 스스로 세우고 지켜나간다. 이렇게 특정한 하나의 역할을 지속하다 보면, 그 역할에 대한 고정된 신념이 형성되는데 이것을 역할정체성이라고 해보자.
- 자아정체성은 하나 이상의 역할정체성에 의해 강화되거나 약화된다. 우리는 다중 역할 속에서 살아가고, 이 중에서 중심자기라고 부를 수 있는 자아정체성이 주변자기라고 부를 수 있는 역할정체성을 포용하고 조율할 필요성이 생긴다.
- 특정 역할에 대한 수행에 자기 자신을 동일시할수록, 나머지 역할과의 연결은 느슨해지기 쉽다. 혹은 특정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특정 역할을 자신이라고 믿고 그 역할의 특정 행동 패턴을 고수하는 경향이 발생할 수 있다. 특정 역할에 대한 다가섬과 거리두기 모두 필요하나, 어느 순간부터 거리두기를 못하고 역할자기를 진정한 자기로 착각하며 자아를 역할로 고착시킨다. 이런 상태는 집중과 몰입을 경험하게 돕기도 하지만, 삶을 경직시키고 특정 역할 외의 삶을 살아갈 책임을 방기 하게 만든다.
- 지금 나는 사실 특정 역할자기를 - 자아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역할정체성 하나 이상을 - 깨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깨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재통합해서 자아정체성의 건강을 회복해야 다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특정 역할정체성이 깨어지는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과 같고, 특정 세계에서 추방자가 되는 것과 같은 경험이 될 것이다. 기존의 세상에서 튕겨져 나온 '고아'가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고아'의 상태다. 내게 손 내밀어 온기를 전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히지만, 근원적으로 아직 '고아의 상태'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