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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방송

Day08. 삼봄씨가 봄울음 소리를 담아둡니다.

by 삼봄
- 목소리를 담아두고 싶은 삼봄씨의 일기 -

시를 쓰고 싶은 씨앗 단어 하나가 떠 올랐습니다. 그 씨앗은 '목소리'입니다. 목소리를 담아두고 싶었습니다. 울림을 담아두고 싶었습니다. 울음을 담아두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목소리에는 각자 저마다의 어떤 울림이 담겨 있습니다. 시를 글로 쓰기만 하다가, 소리 내어 읽어보고, 녹음해 본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저의 목소리를 담아서 기록해두니, 제 목소리를 종종 다시 반복해서 듣게 됩니다. 지금도 제 안에서 어떤 울림이 몸을 계속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각적 자극에 익숙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잘 못 듣고, 타인의 목소리도 잘 못 들으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울고 있는데도, 자신의 삶이 엉엉 울고 있어도, 그 울림을 느끼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친구가, 자신의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울고 있어도 그 울음을 함께 느끼며, 공감하고, 함께 울지 못하고, 공명하지 못하며 살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밖으로 표현해내는 일은 소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어주는 귀 또한 소중합니다. 귀 안에 보면 고막이 있잖아요? 사실 병원에 가지 않는 이상 자신의 고막을 직접 보기란 쉽지 않겠네요. 우리 몸에서 울려 나온 소리가, 입 밖으로 파동의 형식을 띄고 울려 퍼지고, 상대방이나 자기 자신의 귀로 들어가면서 그 울림이 전해집니다. 나의 울림과 울음이 너의 울림으로 가서 닿을 수 있는 이 파동이 이어지는 과정이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저 삼봄의 목소리들이, 저의 울음들이 조금은 진정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벗들에게 제 삶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들이 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벗들에게 너무 소란스럽게 느껴지는 소리가 아니길 바라지만, 지금 삼봄은 깨어진, 깨어지는, 깨어져버린 상태라서 약간은 소란스러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봄의 목소리를 듣기로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삼봄 안에 스며있는 봄들이 조금 더 일깨워지고 난 이후에는, 삼봄의 깨어짐이 좀 수습되고 난 이후에는, 벗의 울림도, 벗의 울음도, 벗의 목소리도 차츰차츰 담아내고 싶습니다. 이런 삼봄의 목소리를 담아서 시 한 편 적어두고 싶었습니다. 삼봄의 목소리와 우리의 목소리들을 모두 담아보고 싶지만, 아직은 제 자신을 돌보기에 바빠서, 일단 지금은 삼봄의 목소리만 듣고 담아둡니다.




울음을 담다

_ 삼봄詩 _


몸이 떨려와 소리를 내봅니다.

목구멍 열어서 말을 합니다.

제 소리가 고막에 닿습니다.

울림을 듣다가 알게 됩니다.


별거 없는 말소리 사이에

죽어버린 남자의 울음과

아기의 울음소리가 스며있습니다.

목소리를 담았는데 울음이 담겼네요.






2020.11.18

태어난 지 여덟째 날

자신의 목소리를 더 잘 듣고 싶어서

울림을 담아 봄방송을 시작한

삼봄씨 이야기

삼봄의 목소리로 낭송한 詩 '울음을 담다' 듣기 : http://podbbang.com/ch/-1?e=23882310

ㅁ 삼봄詩談 _ '울음을 담다'가 더 좋은 詩가 되려면?

- 제 목소리들을 들어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올라왔습니다. 제 안에서 떠도는 마음들이고, 깨어진 마음의 파편이고, 그 사이에 스며있는 마음이며, 삼봄씨의 울림이고 울음입니다. 삼봄씨의 '울음을 담다'란 시에 함께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돌아보고, 다시 보고, 그리고 돌보는 중입니다. 오늘 아침에 끄적여 본 '울음을 담다'라는 시를 다시 읽어보고 난 이후에 제 안의 목소리를 추가적으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일단 가능하면 팟빵에 올려둔 방송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글로 보는 것과 소리로 듣는 것은 아마도 꽤 다른 울림을 줄 것 같습니다.

- 제가 쓴 이번 시가 좋은 시라고 하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고, 들어보고, 머무르면서 바라보고 있고, 저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 시가 조금 더 좋은 시가 되려면, 시인인 저의 목소리만 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목소리를 담아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당신'의 목소리가 담기면 더 좋은 시로 재탄생할 것 같습니다.

- 이 시를 쓴 삼봄씨는 아직 자기 목소리밖에 못 듣고 있습니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도 울고 있는데, '당신'도 울고 있는데, 다른 벗의 울음소리는 듣지 못하고, 오직 자기 목소리만 시에 담았습니다. 세상도 슬피 울고 있는데, 아직 그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남자-가면 쓴 검은 용-의 목소리와 갓 태어난 삼봄의 목소리가, 그 울음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입니다. 혹은 그저 시인의 부족함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삼봄씨가 조금 더 자라나서 더 잘 돌아보고, 다시 보는 법을 알고, 자기 스스로를 잘 돌보고,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여유로운 상태가 된다면 어찌 될까요?

- 만약 그렇다면 마지막 문장이 조금 변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죽어버린 남자의 울음과 / 아기의 울음소리가 스며있습니다. / 목소리를 담았는데 울음이 담겨있네요."라고 적어둔 문장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죽어버린 남자의 울음과 / 아기의 울음소리가 스며있습니다. / 그리고 당신의 울음소리도 함께 스며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문장을 끝맺었더라고 한다면, 이 시가 삼봄씨 개인의 시가 아니라, 이 시를 읽는 '당신'과 함께 하는, '벗'들과 함께 하는 그런 조금은 더 좋은 시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시를 쓰고 나면 항상 모자람을 느낍니다. 그 모자람을 고쳐서 '우리의 소리'를 더 잘 담아낸 시로 바꿔서 적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삼봄씨가 다른 사람을 돌보기 위해서 시에 목소리를 담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의 부족함과 모자람, 그리고 시인으로써 미성숙함을 그냥 그대로 남겨두기로 하겠습니다.

-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저는 왜 이런 이야기를 남겨 둘까요?

- 제 울음소리를 누군가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제 목소리를 누구에게라도 전하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삼봄씨에게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제 자신을 돌보는 여정을 걷고 있기에, 제가 스스로 제 목소리를 들어주고 싶어서, 들어줌으로써 돌봄을 제공하고 싶어서,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겨둔 것입니다.

- 하지만 함께 제 목소리에 머물러 주신, 저의 울음에 함께 울어주신, 삼봄의 소리에 함께 울림을 느끼고 계실 벗이 있다고 한다면, 고마운 마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시를 쓰기 전에도 적어두었지만, 여러분 자신의 소리, 여러분 내면의 울음도 함께 담을 수 있는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런 시인으로 사는 시기가 내일이 될지, 일 년 후가 될지, 한참 후가 될지, 아니면 영영 그렇게 될 수 없을지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 끝으로 아주 잠깐이라도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면,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아주 작은 행동을 하나라도 직접 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런 필요 없는 말을 덧붙여 둡니다. 고맙습니다.

삼봄의 목소리로 "삼봄詩談"을 다시 듣고 싶다면 : http://www.podbbang.com/ch/1778522?e=23882313

앞으로도 삼봄의 목소리를 들어줄 여유 있으시면,
삼봄씨의 팟빵 채널 - 삼봄일기를 구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삼봄일기 바로가기 링크 : http://www.podbbang.com/ch/1778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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