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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 Bright Jul 03. 2020

전라북도, 기다림에 귀 기울이다

사운드스케이프 전북.travel

좋은 경치는 경치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는다. 쌓인 세월이 사람들의 이야기와 얽히며 비로소 절경이 된다. 단단한 암벽에 온 힘을 다해 몸을 던지는 파도, 고즈넉한 산사를 가득 메우는 범종의 울림, 바람을 따라 몸을 비벼대는 청보리 잎사귀, 신분을 뛰어넘는 남녀의 절절한 사랑 노래, 이 모든 전라북도의 소리는 바쁜 일상에 떠밀리듯 살아온 우리에게 조금 천천히 가도 좋다고 속삭인다.


부안 채석강 ⓒ  Studio Kenn


전설을 잇다


새만금방조제는 전북 부안과 군산을 잇는 둑으로 길이가 33.9km에 달한다. 1991년 첫 삽을 뜬 공사가 끝나기까지 19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폭은 평균 290m(최대535m)이고, 높이는 평균 36m(최대 54m)에 이르는 대형해상구조물로, 대부분 물속에 잠겨있고 바깥에 드러나는 부분은 평균해수면 위로 11m 정도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바다를 가로질러 육지와 섬을 잇는 도로는 직접 달려보지 않고는 그 세계최장의 규모를 가늠할 수 없다.


© Saemangeum Development and Investment Agency

수십개의 섬이 모인 고군산군도는 이 방조제 덕분에 육지와 이어졌다. 이 섬들은 마치 산처럼 바다 위에 우뚝 서 있는데, 고려 시대에는 서해를 지키는 수군의 전초기지기도 했다. 경관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한 군도 중심부 섬무리를 일컬어 ‘신선들이 거닌다’는 뜻의 선유도라 불렀다. 바다에 난 도로의 가장 끝에는 ‘크고 길다’는 이름의 대장도가 자리잡고 있는데, 몇 년 전에 생긴 크고 긴 다리 덕분에 그 이름에 얽힌 전설이 들어맞게 됐다.


대장도 정상 ⓒ  Studio Kenn


대장도를 탐험하는 길은 빨리보다는 천천히가 좋다. 정상까지 가파르게 놓인 계단보다는 등산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둘러 올라가는 길이 훨씬 재미있다. 샘물이 솟아 넘친 진흙길이 나오기도 하고, 암벽을 기어 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돌아 오른 봉우리 정상에서는 선유도의 절경과 저 멀리 육지로 향하는 다리까지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배가 아니면 올 수 없었던 먼 섬은 이제 여유로운 여행길의 일부가 되어 천천히 걸어 오를 수 있는 전망대가 되었다.



역사를 관통하다


판소리는 한국 전통을 대표하는 노래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2003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도 선정된 판소리는 예전에는 전라도에서만 들을 수 있는 귀한 소리였다. ‘춘향전’이나 ‘흥부전’ 등 유명한 고전문학작품의 배경 또한 전라북도에 실존하고 있다.


판소리는 민속연희극이라 그 역사에 대한 기록은 없고 향반들의 방증으로만 남아 있다. 전통적으로 광대에 의해 불리운 노래는 농촌이나 장터에서 평민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어떤 때는 양반·부호들의 정원에서 연희하기도 했다. 다른 민속극에 비해 훨씬 폭 넓은 계층을 포용하며 계속 그 영역을 넓혀 갔다.


남원 광한루원 ⓒ Studio Kenn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또의 자제 이몽룡이 봄에 남원의 광한루를 찾았다가 그네를 타는 성춘향의 아름다움에 반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춘향가’는 완창에 8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최고라 평가 받는다. 그 배경이 되는 광한루는 조선이 막 첫 발을 내딛는 무렵인 1419년에 작은 누각으로 시작되었으며,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638년 재건, 오늘날에 이르렀다. 넓고 쾌창한 모습으로 전통 누정의 대표격으로 손꼽히는 이 아름다운 곳을 눈으로 보면, 춘향과 몽룡이 부른 절절한 노랫말이 더 선명하게 마음에 닿는다. 오랜 역사를 관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락이 생동한다. 바로 옆에 조성된 춘향테마파크에서는 수시로 소리꾼들의 판소리 공연이 열리는데 이 또한 한국의 소리를 체험할 좋은 기회일 것이다.



비움으로 방점을 찍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오른 전나무숲을 통과하면 내소사에 이를 수 있다. 하늘 높이 솟은 나무 위로 작은 새들이 날아들며 지저귐을 주고 받는다. 내소사는 백제시대인 633년에 세워져 오랜 세월을 중건 및 중수를 거듭해온 고찰 중의 고찰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조선 중기인 1633년 재건되었는데, 이때 지어진

대웅보전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를 깍아 서로 조립/결합했다.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미적 가치도 뛰어나 당대 목조건축의 정수로 추앙받는다.


내소사 오르는 길 ⓒ  Studio Kenn

오랜 세월 해와 비를 맞으며 단청의 색은 희미해졌지만, 건물을 지탱하는 나무의 빛깔이 말로 표현할 수 없게 고풍스럽다. 나무를 깎아 만든 꽃문양이 화려한 문창살을 여니 향내음과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밀려든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사찰엔 의외로 완성되지 못한 곳이 있다. 바로 비어 있는 충량과 미완의 벽화다. 여기에는 전설이 함께 전해진다.


대웅보전을 짓기 시작했을 때, 불전을 짓는 목수를 구경하던 동자승이 장난으로 나무토막 하나를 숨겼다고 한다. 나무 다듬기를 마친 목수가 목침 개수가 부족함을 알고 건축을 아예 포기해버리려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동자승이 나무조각을 돌려주지만, 부정을 탄 나무를 쓸 수는 없다며 그 한 조각을 빼고 건축을 마치게 된다. 그 다음으로는 벽화를 그릴 차례가 되었는데,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화공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하루를 참지 못한 동자승이 또 일을 냈다. 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열린 문으로 날아가버린 것이다. 그렇게 비어버린 곳은 누구도 억지로 채우지 않고 그대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내소사 타종 ⓒ  Studio Kenn


해가 넘어갈 무렵, 스님이 종 앞에 섰다. 골짜기 구석구석으로, 나뭇잎 하나까지도 웅장한 종소리와 함께 진동한다. 버석거리는 모래를 밟으며 오가던 이들이 종 앞에 멈춰서 합장을 하고 섰다가 불전으로 올라간다. 미완의 상태로 완성된 내소사의 아름다움은 이곳을 찾은 누구에게나 따듯한 위로를 전한다.



자연의 속삭임을 듣다


바다를 향해 돌출된 부안의 채석강은 산림경관과 해안절경의 멋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내소사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해안에는 수천만권의 책을 펼쳐 겹겹이 쌓은듯한 거대한 층리를 비롯, 해식애와 파식대 등 독특한 절경이 눈을 사로 잡는다. 바람과 파도가 깍아 만든 절벽 위로 더는 땅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우뚝 선 상록수가 초록 잎을 반짝인다. 200m를 줄지어 군락을 이룬 후박나무 123그루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5~6미터 높이로 크게 자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풍성한 잎으로 막아선다. 그 안쪽에 농작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큰 고마움의 인사를 가장 먼저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고창 청보리밭 ⓒ  Studio Kenn


고창의 청보리밭엔 소란스럽지 않은 축제가 한창이다. 보리가 익어가는 초록의 밭 사이로 사람들이 오간다. 두런두런 나누던 사람들의 대화 소리는 야트막한 능선을 넘어 더 좁은 길로 들어서면 잦아든다. 바람이 한바퀴 맴돌아 나가는 자취를 흔들리는 보리의 물결로 단번에 알 수 있다. 바람과 함께 바스락거리는 잎사귀들이 조금만 더 천천히 걸으라고 속삭인다. 웅장한 자연 속 켜켜이 쌓인 이야기에 느긋하게 귀 기울이는 여유로움이 여행을 풍요롭게 채운다.          





[월간 KOREA 2019-06 Story 전라북도] 사진 STUDIO KENN 글 SAM B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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