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안녕, 30대는 처음이지? - 16. 내가 우는 이유)
요즘은, 아니 최근 들어 나는 눈물이 많아졌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별 것 아닌 대사, 장면에 울컥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노래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때는 항상 음악을 틀어놓는 편이다. 적막감도 나쁘지 않지만, 음악이 주는 안정감은 꽤 든든하기 때문에. 어느 날처럼 음악을 듣다가, 우연히 라디오 채널을 듣게 되었다. 신곡을 찾아 듣는 편은 아니라 처음 듣는 노래다, 싶어서 귀를 기울였는데 이윽고 울컥하게 되었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제발 살아남아 줬으면. 꺾이지 마 잘 자라줘, 온몸을 덮고 있는 가시.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견뎌내 줘서 고마워.
견뎌내 줘서 고맙다는 말이 왜 그리 슬프게 들렸는지 모른다.
비록 지금 내 위치가 올곧지 못하고 불안정하지만, 그래도 지금 잘하고 있다고 끝까지 버텨보자고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생각나는 노래였다.
이렇듯 노래가 주는 긍정적인 메시지는 대단하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응원으로 힘을 얻기도 하고, 누군가의 위로를 받기도 한다. 생판 모르는 타인의 위로가 더 달콤한 것도 같은 이치 아닐까.
내가 쓰러지고 싶을 때, 우울하고 울적할 때, 막상 주변의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어려워졌다. 나를 잘 아는 주변인들이지만, 오히려 내 마음을 보여주기 껄끄러워진 것이다. 막연하게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 주위를 둘러보면 막상 털어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에 누군가가 있지만 오히려 외롭다. 외로움을 자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잘 아는 이들의 위로와 응원은 고마울 뿐이다. 그들은 나라는 인간의 히스토리를 잘 알뿐더러, 늘 나의 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전후사정을 모르는 타인의 순수한 위로와 응원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털어 내지 않고, 순도 100%의 위로와 응원을 받고 싶을 뿐이다.
나이를 한 두 살 먹어가면서 나의 감정이나 고민을 주변에 말하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나만큼이나 그들의 삶이 힘들 수도 있으니까 혹은, 내 민낯을 드러내기 두려워진 것일 테다. 오롯이 내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고 들려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홀로 감내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혼자 삭히다가 괜찮다, 괜찮다고 생각하다 보면 정말 마음이 괜찮아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불현듯이 노래 하나에, 드라마 장면 하나, 대사 하나에 울컥하는 거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불행한가? 절망적인가?
그렇지는 않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다만, 회사를 관두면 마냥 행복할 것 같았던 감정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뿐이다. 백수가 된다면 그저 즐겁고 신날 것 같았다. 그러나, 백수의 삶은 녹록지 않다. 가시밭길은 아니지만, 가시방석에 앉아 있다. 타의도 아닌,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시방석이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향후 미래 계획과 같은 것을 놓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 거다. 불안감의 연속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아직 잘 모르겠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거야?
-그러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언제까지 백수일지는 나도 모른다. 언제까지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답을 알면 마음이 편해질까 싶다. 내 손으로 선택했지만, 무기한 백수의 삶은 꽤 불안하다. 당신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불안정함 속에서 가끔 노래가 전하는 메시지로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메시지 혹은 댓글 한 줄을 통해 용기를 얻는다. 브런치를 작성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한 글자, 한 문장을 써 내려가며 불안감은 다소 해소된다. 다시 걸어갈 힘을 얻는다.
다행히도,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후련해진다. 한바탕 울고 나면, 또렷해진다. 감정의 환기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