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고 쓰려서 아리아리랑

by 투명물고기

추석이 오면, 아리랑이 따라온다.

아이도 어린이집에서 배웠는지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하고 흥얼거린다.

“아리랑이 뭐예요?” 묻는 아이에게

아리고 쓰린 마음을 설명해 보지만, 아직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한을 떠올려본다.

님과 함께 고개를 넘는, 사랑과 이별의 노래를 읊조리듯이.


나의 시절, 영화관은 큰 나들이였다.

충무로가 영화의 심장이던 때, 종로 3가 극장가.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그 삼대장은 지금도 내 기억의 간판처럼 빛난다.

몇 시간을 줄 서 기다린 끝에 얻는 즐거움은, 스크린만이 아니었다.

노오랗게 구운 군밤.

틈이 벌어진 알밤 하나를 얻으면, 고민이 시작됐다.

조금씩 잘라 오래 즐길까, 한입에 넣어 기쁨을 폭발시킬까.

망설이는 사이 봉투는 금세 비어 있었다.

지금도 노점에 진열된 밤을 보면, 그때로 곧장 돌아간다.


오늘의 아리랑은 영화 한 편을 불러냈다.

서편제.

국민학생이던 나는 줄거리도 깊은 뜻도 몰랐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가슴에 바위처럼 눌린 답답함은 선명하다.

“한이 있어야 소리를 낼 수 있다”며

자기 딸의 눈을 멀게 만든 소리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장면이 떠올라, 지금도 판소리가 들리면 한(恨)을 생각한다.


한.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뜻풀이조차 한스럽다.

나는 한이 있다고 말해도 될까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나는 소리꾼이 아니다.

한이 있어도 득음을 낼 수 없으니, 대신 글을 쓴다.

몰랐던 기억과 감정이 글을 타고 밀려올 때,

젖은 마음을 꺼내 한 장 한 장 널어 말린다.


글은 소리와 다르다.

판소리는 한을 안고 질러야 하지만, 글은 한이 풀려야 넓어진다.

한을 품은 글은 잠시의 공감을 끌어내지만,

칼날처럼 날 서 있어 다시 펼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쓴다.

내 안의 응어리가 풀리고, 아픔과 기쁨이 함께 노래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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