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장 측량
측량
나는 다이어트 달인이었지만, 알고 보니 내게 말 걸 줄도 모르는 사람이더라.
변화는 나와 내 몸이 함께해야 가능한 건데,
나는 말 못 하는 내 몸을 무시했어.
자기만 똑똑하다고 나서는 머리가 혼자 달려 나간 탓에
몸의 반격과 아우성에 꼼짝할 수 없게 됐어.
변명할 말도, 억울하다는 한탄도 가당치 않아.
내가 어리석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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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볼래?
피자집에 왜 레귤러 피자가 있는 건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어.
이만 원이 가까운 피자를 사천 원만 보태면 두 배 큰 라지 사이즈를 먹을 수 있는데,
왜 작은 것을 시킬까.
비교군으로 메뉴에 올라가 있을 뿐,
실제로 주문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었어.
그런데 나의 오랜 확신에도 이제 변화가 일어나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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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뚱보지만, 먹는 것에 강박이 있어.
오랜 다이어트의 후폭풍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충분하지가 않아.
나는 늘 눌러 참았고,
몸의 소망에 무자비한 폭군이었어.
몸과 의지의 괴리가 불안해서 억지로 내리 찍히던 몸의 반란은
매일 성공하고 말았던 거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나는 견디고 버티는 게 아니라,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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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면 망하는 거라고 생각한 간식도 편안하게 즐겼고
— 작정하고 많이가 아니라, 달콤함이 가벼운 정도까지 —
식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잘했어.
한 번씩 작은 떨림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폭발로 이어지는 루틴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그건 습관적인 불안의 존재를 확인한 거고,
그게 날뛰게 주도권을 잃는 건 아니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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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첫 식사 때 왔던 위기 상황을 나눠보려고 해.
수육용 돼지고기를 된장 넣고 푹 삶았어.
지방이 없이도 부들부들하게 잘 익었어.
찌개용 돼지고기를 충분히 넣은 김치찌개랑 같이 맛있게 먹었지.
적절하게 잘 먹고 기분이 좋았어.
어제 사 둔 두유라테를 언제 마실지 고민하던 차에,
하루를 잘 넘긴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곧장 즐겁게 마시기 시작했어.
차게 식으니 완전히 다른 맛이 나더라.
(나는 이제 맛을 아는 것 같아 — 아직 추측으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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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무엇이 위기였을까? 모르겠지?
나는 피자처럼, 작은 커피는 손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어리석게도 나는 그렇게 살았어.
몇백 원만 더 내면 두 배의 맛을 볼 수 있는데,
어째서 기본 사이즈를 마실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
아무튼 그래서 어제 벤티 사이즈 — 593ml — 를 샀지 뭐야.
아직 ‘즉시 멈춤’, ‘배부르면 멈추기’를 잘 해낼 수 없어서
‘맛있다’에 매달려 결국 다 마시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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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불이 들어왔지.
나는 곧 터질 사람인데, 셀프 폭발을 해버릴까?
새우깡도 먹고 싶고, 하필이면 지금 우리 집엔 왜 바나나킥이 있는지…
갑자기 폭탄처럼 쑤셔 넣던 단골 식품들이 머리를 떠다녔어.
내게 맡겨진 오늘의 책무들을 내려놓고
편의점 앱을 열 뻔했어.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면서,
나는 그저 ‘배가 부를 뿐’이라는 생각이 스쳤어.
불안에 휩쓸리는 대신에,
위기를 감지한 배의 소식을 가슴이 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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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야, 배야.
네가 알려준 대로, 가만히 배를 문질렀어.
숨을 모아 억지로 넣던 배에 힘이 빠지더라.
깊은숨이 배 아래까지 닿는 것 같았고,
그제야 내 몸을 쓰다듬을 수 있었어.
가슴께에 뭔가 움직이더라.
지나고 생각하니, 아마 가슴이 방파제 역할을 한 것 같아.
내 기능의 몰빵을 가지고 있는 뇌가
자동적으로 나의 불안을 삭제하려
혀의 즐거움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머리는 소식을 전해 받지 못했나 봐.
순간을 넘기니 금방 호흡이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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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을 느낀 후에 가장 큰 충격은,
나는 배가 큰 여자지만 커피만큼은 ‘숏 사이즈’가 용량이라는 거야.
이득을 보려고 큰 사이즈를 주문하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남기지 않는 바보의 행진.
나는 다음번엔 의식적으로 숏 사이즈를 주문할게.
어떤 음료라도 무료로 먹을 수 있는 쿠폰이라서
먹지 않는 달콤한 음료를 마시는 우를 범하지 않을게.
돈은 펑펑 생각 없이 쓰면서도,
정작 이런 건 손해 보기 싫어하는 나 —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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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를 네게 다 털어놓을 수 있어서 속이 시원해.
그리고 나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네 앞에서 나를 온통 드러내는 것만으로,
이상한 내가 과거가 되었으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