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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12. 2023

도둑맞은 가난? 이러다간 '없어진 가난'

[ㅈ] 전시하다
허세와 과장을 더해 자신의 일상을 SNS 세상에서 뽐내는 일
행복을 부풀리기도 하고, 불행을 부풀리기도 함


  "인스타 계정 좀 만들어!"란 말을 스무 살부터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인스타 계정이 없는 게 아니며 지인들도 이를 알고 있다. 다만 위의 말에서 '인스타 계정'이란 서로 맞팔하며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계정을 뜻한다. 내 계정은 철저한 비공개에, 팔로워 수 0이다. 10대 때 사진 백업용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현재는 업로드를 멈춘 지도 오래다.


  20대간의 새로운 만남에선 번호 공유보다 인스타 공유가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 "인스타 해요?" "인스타 맞팔할래요?" 같은 말이 빈번하게 들려오니 인스타 안 하는 자로서는 멋쩍게 웃을 일도 많다. 21살 때는 학과 사람들과의 교류에 편승하고 싶어 새로운 계정을 만들었지만 반년도 안 돼서 탈퇴 루트를 탔다. 지인들의 일상을 알 수 있는 건 좋았으나 차라리 만나서 듣고 말지, 라는 심산이었다. 전 세계적인 인기가 무색하게 득 될 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인스타의 존재가 부정적으로만 비추어졌다.




  인스타에 주먹구구식으로 글 쓰는 행위에는 '힙하지 못하다' 혹은 '찐따 같다'란 평가가 오간다. 몇몇 유저들의 경우 해시태그는 십몇 개를 달면서 글은 한 줄조차 배격하는 게 모순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글자 수의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리 이모지만 띡 쓰고 말까 의아할 때가 있었다. 스토리(* 24시간 동안 열람 가능, 볼 수 있는 사람을 지정할 수도 있음)에는 아예 한 편 분량의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어 더 그랬다. 스토리 말고 피드(* 게시글이 모인 공간, 불특정 다수도 열람 가능)는 사진이 주(主)라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내 사진을 봐, 사진 속 내 얼굴을 봐, 사진 속 내 옷차림을 봐, 내가 먹은 음식을 봐, 내가 간 곳을 봐.... 이것이 다수 유저들의 의도다. 의도 아래에는 '자랑' 내지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나 또한 보유한 계정이 있으니, 모든 유저가 이러한 용도로만 쓰고 있지 않음을 안다. 여기서 지목하는 건 인플루언서를 비롯한 인스타 애호가들이다. 인스타에 푹 빠진 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 사회 문제로 봐도 무방하다. 특별함을 일상인 양 '전시'함으로써 사람들 간의 욕심과 결핍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대기업 손녀의 유튜브가 최근 화제 됐었다. '대기업 손녀'인 것만으로도 부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의 관심을 사기엔 충분했지만, 그보다는 브이로그에 나오는 장면들이 문제가 됐다. 대기업 손녀의 브이로그가 '일상적'인 데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속출한 거였다. 오마카세로 밥을 먹고, 백화점에 가서 명품을 사고,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는 면모는 일상으로 간주될 만큼 20~40대들에게 친숙해져 버렸다. 대기업 손녀의 재산과 자신들의 재산이 같을 리 없는데 생활은 비슷하다는 데서 경각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욜로족'이란 말은 내 나이 17살 때 유행했다. 명품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등교하던 한 선배(당시 18살)의 상태메시지가 '욜로'라 더 각인됐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혈연인 언니 또한 '욜로족'의 특성을 많이 보이고 있다. <저축보다는 소비> <미래보다는 현재>가 이들의 주된 주장이다. 저축은 미래를 위한 일이지만 소비는 현재의 내가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니 돈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행복의 방안은 많고 많으며 저마다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나 자칭 '욜로족'이라 일컫는 이들과 인스타 애호가들의 행복은 아름답거나 잘생긴 얼굴, 명품 브랜드, 해외여행, 골프 같은 장비가 필요한 취미 등에 쏠려 있다는 공통점은, 행복이란 이름 뒤에 숨겨진 다른 욕망을 살펴보게 만든다.


  그들의 행복이 거기 있다는 건 태클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전시 행위가 심해질수록 타격을 입는 건 자라나는 아이들이 된다. 중학생 때 친구들이 '아이폰'을 처음 썼다. 그때도 아이폰 좋다는 애들이 많았는데 자랄수록 <갤럭시보다 애플>을 넘어 <갤럭시 말고 애플>이란 의견이 내 소속인 10대들 사이에 깊이 내려앉았다.


  10대를 벗어난 지금, <갤럭시 말고 애플> 정서는 사회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자신의 폰이 갤럭시인 데에 부끄러워하거나, 친구들 다 아이패드(* 애플사 제품) 쓴다고 나도 아이패드 사달라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비교는 결국 배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성년자에겐 비교와 배격만큼 두려운 게 없다. 요즘 아이들은 욕심이 왜 이리 많냐고 지적할 게 아니라 아이들의 욕심을 누가 만들어냈는가에 반성해야 한다.  




  미성년자들의 우상이나 마찬가지인 아이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명품 브랜드의 일명 '앰버서더(* 우리말로 홍보대사)'가 된다. 요즘 초통령인 모 그룹의 멤버가 신고 나온 명품 운동화를 초등학생 딸이 사달라 한다는 내용이 기사로 나온 적 있다. <갤럭시 말고 애플>이 2030을 넘어 10대 사이로 퍼진 것처럼, <일반 브랜드 말고 명품>이란 정서가 미성년자 무리에 자리하는 건 예견된 수순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우리 부모님이 몰고 다니는 차, 가족들이 입는 브랜드가 아이들 입에 구체화돼서 오르는 이상 '빈부의 갈라 치기'를 넘어 '가난 지우기'로 나아가게 된다. 아파트, 차, 브랜드 같은 대상은 가난한 계층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난이 뿌리 뽑히려면 멀어 보이는데, 부에 열광하는 정서가 강해지는 한 가난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지워질 수밖에 없다.


  "저들은 왜 가난할까? 저들의 가난에 사회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라는 성찰이 아니라

  "저들은 왜 가난할까? 요즘 같은 사회에서 아직도 가난하다니, 저들의 잘못이다"라는 편견으로 이어진다.

  종지에는 '저들' 자체가 머릿속에서 없어지고 만다. 국민이 가난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사회의 빈부격차는 심화될 뿐 나아질 수 없다. 내가 가난하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어릴 때는 가난했지만 국장 8분위인 현재는 가난을 내 정의로 삼지 않는다. 8분위가 가난을 입에 올린다면 1분위는 어떤 표현을 써야 하는가. 


  박완서 작가의 '도둑맞은 가난'이란 책 제목처럼, 근래는 가난이 하나의 콘텐츠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누가 봐도 중산층인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더 잘 사는 집안이 있다는 '당연한 이유'로 '가난'을 써먹고 있지 않은가. 오래전에 중산층 정의가 비뚤어진 것처럼 가난의 정의 또한 바뀌어 버린다면, 진정 가난한 이들의 존재는 지워지고야 만다.


  소비를 막는 건 자유의 침범이라 말하니 태클 걸지 않겠다. 다만 '소비자'라는 건 사회 경제의 일원인 어른들 아닌가. 자기들의 그릇된 행동이 미칠 영향에 대해선 왜 함구하는가. 오늘날 어른들의 명품 욕심이 몇 년 후 꼬마들의 명품 욕심으로 이어지는 걸 진정 바라는가. 스무 살 이상의 성인들은 속히 바뀌어야 한다. 어른들의 이기적인 자유 말고 다음 세대의 보다 나은 사회 환경을 위해 제발 좀 불편해지시길!


'전시하다'의 용례
1) 사진 한 장 전시하겠다고 지금 1시간째 사진 찍고 있잖아
2) 인스타에 전시하는 게 누굴 위한 행복이니?
약자의 편에 서는 게 진정한 어른의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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