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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12. 2023

보행자가 고라니면, 운전자는 뭔가요?

[ㅊ] 초록불
보행자 따로, 운전자 따로 볼 게 아니라 같이 눈여겨 봐야 하는 신호
빨간불일 때보다 더 위험한 순간이 많음


  등하굣길이나 출퇴근길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인성이 박살나는 건 시간 문제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톡톡하게 치른 까닭일까, 체념이 됐는지 대학교 다닐 동안은 버스 안에 빌런을 만나도 화가 덜 났다.


  그런데도 등하굣길에 화나는 순간은 빈번했다. 대중교통에서 발생하는 화를 억누르니, 오만 횡단보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 A 터미널 가기까지 7~8개의 횡단보도를, B 터미널에서 학교 가기까지 6~8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오고 가는 방향에 따라 개수 차이 발생)


  신호 없는 곳에선 하염없이 기다리기 일쑤였다. 네 발자국이면 건널 수 있는 짧디 짧은 횡단보도에 서 있는 날에는 인상이 자연히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유교걸로서의 도덕 정신은 내려놓은 채 "너네들만 출근하냐? 나도 등교해야 돼!"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싶어졌다.


  어디 이뿐인가. 인도가 초록불이고 차도가 빨간불인데도 스멀스멀 기어오는 차량들은 끊이질 않았다. 나보고 느리게 걸으라는 건지, 보행자들이 건너는 와중에도 움직이는 차량많았다. 한 번은 친구가 옆에 있어 화가 더 났다. "아, 저런 차들 정말 싫어!!!" 소리쳤더니만 운전자석 창문이 열려 있다는 게 아닌가. 시력이 좋지 않아 나는 보지 못했는데 시력 좋은 친구 왈, 아저씨 표정이 꽤나 당혹스러운 눈치였단다. "들렸다니 나이스!" 싶다가도 욕 안 섞길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욕이 귀에 익었던 탓인가, 욕도 싫고 욕하는 이도 싫어한다. 한국어처럼 단어 많은 언어가 어디 있다고 숱한 표현들 놔두고 상스러운 비속어를 내뱉어야겠는가. 여기서 팁, 비속어 들을 때보다 욕 안 섞인 바른 말 들을 때 사람은 더 화가 나는 법이다. 그러니 욕 말고 말빨 늘려야 싸울 때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


  아무튼, 성질이라는 게 제어한다고 조절되는 게 아니니 욕을 안 내뱉고는 못 견디는 상황들도 분명 있다. 이때는 나도 욕하는 편이지만 머릿속이나 목구멍에서만 욕을 굴리든가 혼자 있을 때 한다. 옆에 버젓이 사람 있는데도 욕하는 사람은 하수 중의 하수다. 특히 옆에 어린 아이가 있는데도 욕을 내뱉는다? 최상급 하수다.


  이런 내가 하필이면 부모님을 상대로 욕을 던졌다. 아빠 앞에서 "시X"을 외친 적이 있다. 잠깐, 잠깐! 돌멩이는 찾지 말아주세요. 우리 아빠인 줄 몰랐습니다. 집앞 횡단보도에서 아빠가 절 칠 뻔했거든요.




  부모님이 마트에 다녀온다 하여 나는 멍멍이와 산책에 나선 날이었다. (멍멍이가 다리 관절이 안 좋은 데다 수술받은 전력이 있어 집에 개수레가 구비되어 있다.) 이날, 어김없이 개수레에 멍멍이를 태우고 산책을 나서다가 인내력 테스트를 경험하는 줄 알았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는데도 저 멀리 달려오던 차량이 멈출 생각을 안 하는 거였다. 이럴 때 나도 지지 않고 움직이는 편인데, 약자인 멍멍이가 있어서 뒤로 물러섰다.


  화를 꾹 누르고 개수레를 다시 미는 순간 웬 차가 뒤에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가까이 오는 게 아닌가. 다행히 내가 한 발자국 앞서 고로 이어지진 않았다. 운전자석은 보이지 않았는데 백미러로 보이겠거니 싶어 맹렬하게 노려보던 중 욕이 나오고 말았다. "시X, 미친 거 아니야!" 차주는 사과도 안 하고 줄행랑쳤는데 차량 번호가 어라리? 아니나 다를까,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욕한 대상이 다름 아닌 운전석에 있던 우리 아빠였다는 거다.


  하마터면 '딸이랑 강아지까지 죽인 아빠'로 뉴스 탔을 게 뻔하다고, 아빠는 비판과 비난을 많이 들다. 내가 참지 않고 떠들어대기 때문에 지금도 듣고 있다. 이래야 고쳐진다. 우리 가족 드라이버아빠와 언니 둘인데, 아빠의 운전을 언니가 빼다 박았다. 운전자 집단에 반감생긴 지 꽤나 됐다는 뜻이다. 착한 운전자들 많다는 걸 알지만 가장 가까운 한 운전자는 날 칠 뻔했고, 다른 운전자 또한 꼼수 부리기 일쑤며, 횡단보도에서 멈출 생각 없는 운전자들 때문에 5분 일찍 나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가.


  차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눈치다. 차 없는 집 찾기 힘들고 한 가정에 두세 대의 차량을 보유한 집도 허다하다. 얼마 전, 동네 어린이 공원(* 놀이공원 말고 어린이 맞춤 공원)이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갔다. 내가 어릴 때부터 대학 졸업 전까지 같은 생김새였으니 퍽 낡았다는 뜻이다. 동네 어린이들이 군말 않고 논 것에 대견해 하진 못할 망정, 동네짱 통장님께서 이왕 바꿀 거 공용 주차장으로 만들자고 했다는 게 아닌가. 23년차 뚜벅이로서 차주들의 기세가 지나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참 많다. 이 주제를 굳이 다루는 이유다.




  블랙박스 전문이신 변호사 유튜버는 텔레비전에도 자주 보인다. 이상한 운전자 VS 정상 운전자 구도일 때가 많아 보이지만 이상한 보행자 VS 정상 운전자일 경우 반응이 그리 뜨거울 수 없다. 무단횡단하는 보행자 때문에 사고난 경우, 영상이나 뉴스 댓글들 보면 핫플이다, 핫플. 그들이 보행자 집단을 싸잡아서 욕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지만 '고라니'라는 혐오 표현까지 생기지 않았는가.


  틀딱, 맘충 같은 혐오 표현이 일상어가 된 사회에서 혐오 대상은 언제나 소수 집단이다. 혐오 표현이 익숙해질수록 다수 집단은 자기들의 무시가 '타당 행위'인 줄 안다. 더욱이 보행자 집단에는 어린이, 노인 등 절대 다수가 약자다. 달리 말해, 운전자 집단의 증가로 이상한 운전자 또한 늘어나는 현상은 약자 혐오 야기한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앞에서 죽은 초등생의 이름을 들먹이며 '제2의 XX이'라 부르는 것만 봐도 소수는 한국 사회에서 결코 배려받을 수 없다. 이상한 자들을 뿌리 뽑을 수 있게 다수를 그르치는 게 우선책이. 이상한 보행자들에게도 합당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핸들을 쥔 운전자가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 우선책이라는 거다.


   양보해 주시는 착한 운전자 여러분들, 보다 나은 운전 문화를 위해 이상한 운전자 집단의 개도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저도 몇 년 간 아빠와 언니를 그르치고 있으니 주변에 이상한 운전자가 있다 하면 참지 말아주세요. 모든 운전자는 성인이지만 보행자에는 어린이 포함됩니다. 노인 요. 리는 분별력 있는 성인 아닙니까. 싸울 태세를 갖추기 전에는 <약가 있는가> <약자가 누구인가>부터 보셔야 합니다. 보행자분노를 '집단의 일반화' 반박하시는 것도 당연 이해하지만 횡단보도는 목숨이 오가는 현장잖아요. 운전자분들이 이것만큼은 약자의 분노에 귀기울여주시길 부탁드려봅니다.


'초록불'의 용례
1) 초록불이어도 왼쪽 오른쪽 살펴보는 걸 잊지 마렴
2) 초록불인데 속도 안 늦추는 건 싸우자는 건가?
하염없이 서 있어야 하는 문제의 횡단보도. 앞뒤로 이어진 게 무척 길어 출퇴근 시간이면 차량이 많이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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