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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13. 2023

싸운다고 콩고물 떨어지나요

[ㅋ] 큰소리
상대보다 자신의 감정을 우선으로 두는 사람들이 쓰는 수법


  "너 같은 아기는 한 트럭을 갖다 줘도 키울 수 있다" 갓난아기였을 때 어른들에게 자주 들은 말이라 한다. 자다 깨도 보채는 법 없이 침대에서 혼자 놀던 아기, 집에 홀로 남겨둔 채 잠시 나갔다 와도 될 만큼 우는 횟수가 손에 꼽기는커녕 아예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순둥한 아기', 표현만 보면 참 좋아 보이지만 아기의 삶을 위해서는 순둥순둥하다고 마냥 좋아할 게 아닌 듯싶다.


  차라리 떼쟁이였다면 좋았으리란 생각을 자라면서 종종 했다. 언니는 날 때부터 심각한 떼쟁이였고 고집을 꺾는 법이 없어 아빠의 성질을 돋우기 일쑤였다. 가뜩이나 싸울 일 많은 부모님은 언니의 양육 방식을 두고도 부딪치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순둥이' 둘째는 내쳐질 수밖에 없었다. 아빠를 사랑하고, 엄마를 사랑하고, 언니도 좋아하지만 가족들과 있을 땐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불과 초등학생일 적 이러한 불편함에 시달렸다.


  10대가 되면서는 우리 가족의 처지가 지나치게 싫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저리 싸워?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지. 싸우기 싫으면 집을 나가든지. 꾸역꾸역 집에 있으면서 성질은 왜 안 죽여....' 어릴 때건 10대 때건 지금이건 가장 애착이 강한 대상은 엄마였기에 내게 있어 '악인'은 아빠와 언니가 되었다. 엄마가 힘들어하는 날에는 두 사람을 증오하다시피 했다. 증오하는 동시에 가족에게 이런 마음을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서 자책감도 심하게 느꼈다.




  어려서부터 가족들이 싸운다 하면 옆에서 엉엉 우는 역할을 맡았다. 10대 때도 변함없었는데 그러다 집에 멍멍이가 오면서 나도 '큰소리'란 걸 내게 됐다. "얘가 무서워하는 거 안 보여? 제발 목소리 좀 낮춰. 한심해 죽겠어" 작은 강아지를 옆에 두고도 충돌을 이어가는 이들을 보며 증오를 넘어 혐오가 느껴졌다. 싸울 때마다 저만치서 떨어져 있던 애가 한복판에 끼어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니 가족들은 당황한 눈치였다. 그때 나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큰소리'를 내야 한다는 잘못된 팁을 얻었다.


  이날 이후부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언니의 자존심을 깎아내렸고, 아빠에게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다. 언니와 아빠는 힘이 세고 고집이 강했다. 하나 말과 글로는 언니와 아빠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언어가 무기로 쥐어지면 저들의 기세를 꺾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았다. '어차피 잘못은 네들이 먼저 했잖아. 네들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거야' 자꾸 합리화했다.


  '나는 엄마가 우선이야'라는 마음이 바탕에 있었는데 그렇다고 엄마하고도 안 부딪친 건 아니었다. 엄마는 나의 변화를 누구보다 싫어했으며 어릴 땐 안 이랬던 애가 왜 이리되었느냐며 화도 냈다. 아마 나까지 싸움에 나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울고 있으면 안쓰러워 달래줄 수라도 있지, 개입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자 사달이라도 날까 두려웠으리라.




  결국 사달이 나긴 났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넷이 함께 싸운 적도 처음이었는데, 그 싸움의 원흉이 내 입 때문이라는 게 당혹스러웠다. 언니가 엄마를 무시했고 그런 언니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말을 쏘아댔다. 내 무기가 언어라면 언니의 무기는 힘이었다. 언니가 날 벽에 밀치는 와중에도 절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이하 생략. 결국 혐오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피해자 운운할 수 없게 됐다.


  큰소리를 내봤자 상황이 나아지는 건 없다. 어린 내가 싸움 소리에 벌벌 떤 것처럼, 큰소리가 오가는 걸 좋아하는 이는 나이대 불문하고 없다. 자기들은 당당히 소리를 드높이면서 남이 큰소리 냈다 하면 그 몇 마디 못 듣는 게 참 이기적이다 싶도, 인간이라 그렇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내로남불의 정신이 어디 가겠는가. 내가 가진 건 여전히 언어뿐이었다.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언어의 용도를 전환했다.


  타인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데 전문이 된 것처럼,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도 상황을 넘길 수 있는 말을 익혔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가족이라 별 수 없었다. 그렇다 해서 우리 가족 사이가 썩 화목해진 건 아니다. 21년 넘게 바뀌지 않던 이들이 23년 지났다고 바뀌겠는가. 다만 고성방가가 오간 지는 오래됐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하려 한다.




  비단 가족 관계만이 아니다. 사람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상대를 먼저 바꾸겠다는 생각은 접어야 마음 편하다. 대신 내가 편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가족으로부터의 영원한 작별을 바랐던 나는, 가족과 절연한 이들에게 절대로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절연의 단계까지 몰고 간 건 <집을 떠난 이>가 아니라 <집에 남아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야박해 보여도 별 수 없다. 내 밥그릇 내가 챙기는 것처럼 내 숨통 또한 자기만이 뚫을 수 있다.


  큰소리 내봤자 목만 아프고, 잘못 따져봤자 시간만 버린다. 성질머리 돋우는 대신 입 다물고 있으면 싸움까지 번지지 않는다. 호통보다 무서운 게 침묵이다. 입 다물고 있어야 상대도 눈치를 보게 된다. 남의 말은 '잔소리'나 남의 침묵은 '나의 잘못'인지 의심하게 된다. 스스로 자각했을 때야 사람은 바뀔 수 있는데 이 자각이란 게 참 힘든 모양이다. 그러니 네 시간은 네 시간대로 흘러가라, 놔두면 된다. 이게 옳은 방법은 결코 아니다. 하나 바뀌지 않는 상대와 지내며 숨 막히지 않는 수단이긴 하다.


  이혼하지 않을 거면 싸우지 좀 말고, 집안에 어린아이, 노인, 동물 등 심장 약한 이가 있다면 제발 데시벨 좀 낮춰라. 아이가 조용하다고 아이 존재까지 간과했다가는 아이는 나처럼 무기를 찾는 이로 자란다. 약자 앞에서는 화 억누르기, 싸울 거면 나가서 하기. 힘든 일이라고요? 밖에선 궂은일 잘 견디면서 집안에서의 힘든 일에 나 몰라라 하면 안 되죠. 강산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가정 내 제1 원칙은 '집은 편안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또한 잊지 말아 주시길.


'큰소리'의 용례
1) 큰소리 낼 거면 저기 저 수풀 가서 내뱉어라
2) 큰소리는 웅변할 때 말고 필요 없어
某, 나가서 햇빛 쬐고 화 좀 누그러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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