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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21. 2023

1박 2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박'의 존재

  우리가 첫째 날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건 '박(泊)'의 존재 때문임을 알았다. 여행지 내에서 몸을 눕힐 수 있는 공간은 예민하고도 피로해진 심신을 누그러뜨리도록 도와줬다. 말 많고 탈도 많았던 '별 보기' 이후 자정이 넘어 호텔에 돌아오고 나서도 싸우지 않았다. 희고도 푹신한 침대가 우릴 기다리니, 저마다 취침 속으로 빠져 들길 택했다.


  알람 소리가 울리고 곧장 준비를 시작했다. 첫째 날 집에서 두 사람을 깨운 것도, 둘째 날 가장 먼저 일어나 소음을 유발함으로써 일어나게 만든 것도 나였다. 나 다음 아빠, 그다음 언니 차례차례 화장실과 욕실 사용을 마치고 단장했다. 아빠는 전날의 쓰레기를 정리했고 언니는 왜 이렇게 빨리 준비하느냐고 <웃으며> 핀잔 줄 뿐, 뭐라 하지는 않았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픈 나와 아빠의 바람에 맞춰 여유롭게 체크 아웃을 마쳤다.




  언니가 화를 내지 않은 순간은 아침 중 호텔 안에서로 그쳤다. 고급 호텔의 고운 침대가 언니의 에너지를 넉넉하게 충전해 줬다고 믿었건만. 성질이 불 같은 언니는 욱, 하고 올라오는 순간이 짧고도 빈번하다. 오전 중에 구경한 속초 시장에서부터 언니는 욱, 했고 이후 넘어간 강릉에서도 욱, 했다.


  첫 번째는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 두 번째는 언니가 출발 시간으로 정해 둔 밤 9시에, 나와 아빠가 불만을 제기해서였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방향을 헷갈렸지만 걸어가다 얼마 안 있어 지도를 확인한 덕에 멈출 수 있었다. 다만 도착 시간이 14분에서 17분으로 늘어났고 언니는 <시간을 버린 것>에 기분이 상해버렸다.


  출발 시간을 당기자 한 건, 언니는 다음 날이 개강이고 아빠는 새벽부터 출근해야 돼서이다. 나야 백수 신분이니 시간의 제약이 없지만 언니의 올곧은 태도에 "체력을 많이 써서 피곤하다"는 핑계를 썼다가 언니는 제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내 실수임을 인정한다. 피곤해할 거면 여행지 가지도 말고, 피곤해할 거면 집에나 돌아가라며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언니가 여행지에서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언니의 지시대로 마트에나 들어가 있는 대신 언니를 기다렸다. 아빠의 입 지퍼를 단단히 잠그고 언니에게 다음 장소를 물어보며 따라갔다.


  점심으로 고른 식당이 최악인 바람에 서로 더 예민해진 것도 있었다. 장칼국수와 감자 옹심이 등 대표 음식에 싼 값이 적혀 있어 들어설 때만 해도 다들 웃고 있었다. 하나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며 이상한 맛에 분위기가 돌변했다. 불만사항이 있으면 대놓고 티 내는 언니의 태도가 내 기분을 더 상하게 했다. 나는 "이미 들어온 거 대충 먹고 나가자"는 주의라면 언니는 "음식이 맛없는데 왜 가만히 있어야 되냐"는 주의라 서로가 서로에게 거슬리고 말았다. 강원도 음식으로 끼니 해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바로 근처가 시장인지라 아이스크림 호떡(* 언니의 추천 간식), 아이스 아메리카노(* 언니에게 없어선 안 될 음료)가 쥐어지면서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만....




  천둥 번개가 힘껏 울려 주위 사람들이 다들 놀라 했다. 번개만 울리고 하늘은 멀쩡했기에 우리는 '강릉컷'이라 적힌 가게로 이동했다. 하나 사진을 찍고 나오자 벌써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게에만 있을 순 없으니 비를 잠시 피할 수 있는, 지붕 달린 벤치로 이동했는데 여우비도 소나기도 아니었나 보다. 빗방울이 완전히 거세지며 폭우로 돌변했다. 서둘러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며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그 짧은 거리에도 몸이 축축해지고 말았다.


  강릉 바다에 발 담그기, 대관령에서 양 떼 구경하기란 일정에 불가능 도장이 쾅쾅 찍혔다. 언니는 강릉 바다의 카페 거리에서 커피 마시길 바랐지만 황급히 차를 빼는 사람들과 카페로 피신하는 사람들로 혼잡해 보였다. 많은 비가 예상된다는 안전 문자가 불안을 더했다. 날씨를 찾아보니 강릉은 계속 비가 올 예정인데 서울과 본가는 햇빛 쨍쨍이라 떴다. 강릉에 머무는 대신 서울로 넘어가자는 제안에 언니는 승낙했지만 최종적으로 이 제안이 부녀지간 첫 여행을 망치는 주범이 되었다.


  생각이 짧았다. 강릉과 서울이 언니 기준 먼 거리가 아니라고만 들어 계산을 못했다. 이번 주말에 막바지 여름휴가에 나선 이들이 많다는 걸, 그중 서울에 사는 이들이 다수리란 걸 간과했다. 우리처럼 귀가를 서두르는 건지, 월요일을 생각해서 일찍 돌아가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도로 정체가 계속됐다. 언니는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달리는 걸 택했는데 어찌 됐든 도착 시간은 계속해서 불어났고 차들 또한 이지 않았다. 운전자로서 예민해지면서 지친 이에게 수다는 통하지 않았다. 말을 걸어도 대답은 단답 아니면 뚝뚝 끊겼다. 옆자리(언니), 뒷자리(아빠)에서 푹푹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밤 9시 넘어서야 서울에 도착했다. 운전하느라 힘들지 않냐는 말에 언니는 내내 괜찮다고 했다. 하나 서울 도착 후 뭘 또 찾아본 건지, 지금 출발하면 2시간도 안 돼서 도착 가능하다는 소식에 언니의 뚜껑은 완전히 열려 닫힐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3분의 실수도 <시간을 버린 것>으로 여기는 언니에게 2.5배의 시간을 도로에서 보낸 일은, 언니가 단단히 화나도록 만든 모양이었다.


  나는 나대로, 언니는 언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불만 사항이야 꾸준히 생겼지만 2일째인 일요일엔 그 불만을 상쇄시킬 전망 좋은 호텔, 시원한 바다(* 구경에 그침), 뻥 뚫린 도로 등을 만나지 못했다. 결국 불만을 서로의 탓으로 돌려 버리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내가 잘못한 게 도대체 뭐냐"라고 묻는 언니에게, "도대체 뭐가 문제라 저리 구냐"라고 인상을 팍 찡그리는 아빠에게 친히 설명했다. 언니의 성질이 불 같은 걸 아빠는 알고, 아빠가 고집을 꺾는 법이 없다는 걸 언니는 안다. 서로 다른 문제점이 있다 한들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입 모으지 않았는가. 불만사항을 꾹꾹 누르라는 게 아니라 주말을 1박 2일의 여행으로 못 박은 이상 지금만큼은 집안에서의 태도와 똑같이 굴어서는 안 됨을 둘은 몰랐다.


  둘이 태도를 고치지 않는 이상 이렇게 흘러가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니의 분통과 아빠의 짜증을 다 들으면서도 나까지 화나지는 않았다. 불만, 분통, 짜증, 성질 같은 단어들은 언니랑 아빠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나는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고, 동시에 <우리 가족>이기에 내가 어떻게 굴어야 하는지도 익숙하다. 생판 모르는 남이 이리 행동했다고 하면 쯧쯧 혀를 차기 바빴겠지만 <나와 남>이 아니고 <나를 포함한 우리>이기에 괜찮다. 나라고 이 여행이 힘들지 않았겠는가. 셋 중 둘이 화내는 걸로도 충분하다. 셋 중 화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게 베스트 여행이나 우리 가족에게 베스트 여행은 어째 유럽 투어만큼이나 갈 길이 먼 대상 같다.

  

  월요일은 언니 곁에 남아 있길 택했다. 언니가 사는 서울과 아빠가 사는 경기도는 바로 옆이지만 내가 사는 충북은 동떨어져 있어서 서울에 와 버렸다. 언니가 분노를 혼자 앓지 않게끔 언니와 맛난 점심을 먹고 맛난 카페에 찾아가려 한다. 먼 미래에 베스트 여행을 누리든, 평생 누릴 일이 찾아오지 않든 별 상관없다. 내겐 현재가 더 중요하다. 오늘의 순간을 원만히 넘기고자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서울에서 하루를 보내 보겠다!


지하철에서 애 먹었어요. 뭔지는 몰라도 여기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니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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