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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22. 2023

부녀지간 첫 여행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승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걸음을 서두르다가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어느 날이었다. 시외버스 안은 시원하리라 기대했지만 공기는 갑갑하기 그지없었고, 가죽 시트에 앉자 차라리 밖에 서 있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예매한 자리는 창가 말고 복도 쪽이라 에어컨이 직빵으로 오지도 않았다. 숨을 고르면서 손 부채질이라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창가 자리에 앉은 분이 에어컨 바람 세기를 높여주며 방향을 내 쪽으로 돌려준 거였다.


  심각하게 더웠던 올여름의 어느 날, 서울 사는 친구와 헤어지고 고속 터미널 승차장을 찾아가느라 애먹었다. 타고난 길치라 언제 가도 헷갈리고, 더욱 몰아치는 '사람 파도(人波)'에 죽을 맛인데, 왜 이렇게 촉박하게 보내주는 건지 친구 원망을 조금 하면서 뛰었다. 고속버스에 올라타자 에어컨이 틀어진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공기가 후덥지근하였다. 창가 자리에 앉는 분이 오고 나선 더 더워지고 말았다. 그분이 에어컨을 어찌어찌 만지자 그나마 불어오던 바람이 완전히 멎고 만 거였다.


  에어컨은 창가 자리 위에 달려 있으니, 창가에 앉아야 더 시원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매번 복도 쪽을 고수하는  내가 먼저 내려야 하는 상황(* 경유)이거나, 그도 아니면 편안함을 위해서다. 가끔도 아니고 꽤나 자주 쩍벌다리 혹은 롱다리 혹은 어깨가 넓은 분들과 나란히 앉게 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피할 수 없다면 내가 몸을 틀 수 있도록 복도 자리를 택한다. 이유가 있어서 택이니 다소의 더위 정도야 감내해야 한다.


  그렇기에 첫 번째로 언급한 분의 <배려>는 감사할 일이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번째 분은 찜통더위에도 긴팔과 긴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더워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더위를 탄다는 이유로 에어컨을 틀어달라 하기엔 그분이 워할 수 있었다. 복도 쪽 자리를 누가 앉힌 것도 아니고 내가 예매한 거니, 창가 자리의 권한이라 할 수 있는 에어컨 조작엔 관여하지 않은 거였다.




  가족 여행이 내키지 않던 이유는 이러한 '배려'가 우리 집엔 부재해서라고 생각했다. 난생처음 부녀 지간으로 여행 다니며 눈여겨봤더니만 '배려'라는 게 아예 안 보이기는커녕 자주 보였다. 그런데도 서로 간의 충돌을 끝내 막지 못했다. 언니의 배려를 나는 알아챘지만 아빠는 불만을 그치지 않았고, 아빠의 배려를 나는 눈치챘지만 언니는 납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배려가 부재한 게 아니라 <배려를 알아채는> 정도가 부족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불편한 상황이 잦았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배려 없음'이라는 딱지를 붙인 내 섣부른 행동도 반성하였다.


  갈등이 폭발한 지점은 식당에서였다. 밤 9시가 넘어서야 도착했으니 저녁 먹을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아빠를 위해> 휴게소에 들러 주전부리를 사긴 했다. 와 언니는 속이 안 좋았는데 배부른 아빠는 저녁까지 먹자고 하였다. 조금 먹고 나오자 말에 인원수에 맞게 3인분을 시키자고 했다. 언니는 "그럴 거면, 그냥 아빠 맘대로 해"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언니가 없는 자리에서 아빠는 <딸들을 위해> 저녁 먹고 헤어지려는 거라 말했다. 하루를 헛되이 보낸 데다가 점심도 맛이 없었으니 아빠로서 저녁이라도 든든히 먹이고 싶은 심산이었나 보다. 언니의 운전이 답답했지만 <언니를 위해> 한 번도 화내지 않았느냐면서 아빠 딴에는 언니가 저러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토로하였다.


  첫째 날, 언니와 내가 시장에서 저녁거리를 사 올 동안 아빠는 차 안에 있기로 했다. 그런데 아빠딘가로 사라졌고 조금 이따 초밥 두 세트를 들고 왔다. 점심때 회를 먹은 데다가 저녁거리를 충분히 샀으니 언니는 의아함과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 식구 중 나만 식성이 다르다. 점심이야 속초의 명물이라 하 해산물로만 먹었지만 저녁까지 회를 먹을 정도로, 나를 제외한 우리 식구의 기호가 날 것에 치우쳐 있지는 않다. 아빠는 회 좋아하는 <둘째를 위해> 초밥 찾은 거였다. 말 안 해도 다 알았초밥의 80%를 내가 먹어 치웠다. 초밥이 남았다간 언니가 한 소리 할 테니 <아빠를 위해> 다른 음식 대신 초밥을 공략했다. 아빠뻐했다. 엄마에게 여행 때 있었던 일을 고하면서, "칠칠이가 초밥 다 먹었다니까!"라며 초밥 사길 잘했다는 걸 강조했다. 내가 <누굴 위해> 초밥만 먹었는데요!




  셋째 날인 서울에서 언니는 무거운 배낭을 계속 메고 다녔다. 개강 첫날은 OT로 끝나 챙길 게 없었 내 개인적인 짐을 자신의 배낭에 모조리 넣었기 때문이었다. 초반에는 양쪽 다 메다가, 한 어깨에만 걸치다가, 바닥이나 지하철 위칸에 내버려 두었다. 언니가 카페에 지갑을 두고 오는 바람에 다녀올 동안 가방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는데 생각보다 더 무거워 기겁했다. 짐 좀 나누자는 내 간청에도 언니는 나와 헤어지기 전까지 내 짐을 도맡 들었다.


  카페에서도 내 휴대폰 먼저 충전하게 하였고, 전시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미술관이며 박물관에 데려다주려고 애썼다. "서울에서 놀고 싶은 게 아니라 언니랑 놀려고 머무는 거다"란 말에 두 곳에 그치긴 했지만 이후 간 데도 책 좋아하는 <동생을 위한> 교보문고다. 나는 책 구경 말고 언니랑 대화나 나누고 싶었는데 "카페를 또 가?"란 말에 빈정 상해버렸다. 언니는 "궁금해서 물은 거지, 싫다고 말한 게 아닌 이상 내 말은 거절의 뜻이 아니야"라고 정정했다. 직장이 경기도인 아빠는 3일 동안 집에 못 가고 있는 내가 못내 밟혔는지 <딸을 위해> 퇴근하자마자 부랴부랴 데리러 왔다. 결국 언니랑 아빠 덕에 내 어깨는 무거울 새가 없었다.


  언니와 아빠는 '민폐'에 민감하다. 민폐의 판단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두 사람보다 훨씬 후한 편이다. 범법 행위라거나 다친 이가 있지 않은 이상 가만히 있는다. 반면 언니와 아빠는 한국인답게 기준이 '시간'에 맞춰져 있어 욱 하는 순간이 잦아 보인다. 우왕좌왕하다가 록불에 멈춰버린 앞차를 보곤, 아빠 웃다 말고 '민폐'라며 화를 냈다. 전날, 사고를 낸 오토바이를 보고 언니가 '민폐'라 한 게 떠올렸다. 오토바이와 승용차가 부딪친 모양이었는데 운전자는 어디에 통화 걸기 바빴고 오토바이를 몬 걸로 추정되는 사람은 차들을 향해 저리 이동하라 손짓하였다. 얼굴에서 내 또래인 것 같은 앳됨이 절로 느껴졌다. "저 사람도 참 심란하겠다"는 내 말에 언니는 도로 정체 상황에서 저 사람이 끼친 민폐를 지적했다. 우리가 입은 피해가 뭐 그리 크겠는가. 나는 언니와 아빠가 저지른 실수 내지 잘못들을 톡톡히 기억하고 있다. 하나하나 다 따지면 두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민폐 덩어리>임을 지적하며 넘어가라 했다.




  언니는 "다시는 아빠랑 여행가지 않겠다" 선언했고, 아빠 또한 "다시는 여행에 끼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우리 가족은 모두 똑같다. 매번 잘못을 저지르면서 나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은 채 남의 잘못에만 매달린다"라고 말하였다. 언니와 아빠가 내 말들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 두 사람의 태도를 여러 차례 지적했고 내게도 고쳐야 될 부분이 많음을 언급했다. 나 자신까지 평가의 대상으로 집어넣은 건, 개인이 바뀌기 위해선 스스로 주의하면 그만이지만, 가족 관계를 개선하려모두가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엄마는 내게 맞춰주기만 하는 바보라 했다. 바보면 어떤가. 사회에서 바보인 것도 아니고 가족을 위해서라면 나이에 구애받지 않은 채 계속 바보짓하련다. 엄마의 걱정과 달리 나는 괜찮았다. 언니와 아빠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인 건 맞지만 그뿐이었다. 이 여행이 계획된 원인은 '언니의 바다 사랑'이었데, 바다에 별 감흥 없는 내가 1순위로 내세운 건 '가족 간의 시간'이었다. 아빠랑 떨어져 지낸 세월이 길었고, 언니는 일찍부터 독립생활을 시작했기에 자주 보지 못했다. 날씨가 우릴 방해한 데다 막판에는 사달까지 났지만 1순위 목적만큼은 달성했으니 상관없다. 시간은 흐른다. 여행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안 좋은 과거야 변화의 발판으로 삼으면 그만이다. 발판으로 삼지 못하겠다면 잊으면 된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굳이 따지진 않으련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8월 30일까지 전시 중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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