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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22. 2023

애증과 애정, 그 분기점엔 강아지

  ※ 우리 집으로 굴러온 강아지의 애칭은 '멍멍이'다. 이름도 있고 별명도 다양하지만 멍멍이라는 말이 내겐 강아지의 2견(犬)칭 같아 글 안에서는 멍멍이라 부르는 편이다. 사람의 2인칭으론 너, 당신, 그대, 자네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표현을 모두 좋아한다기보단 2인칭으로 표현했을 때 묻어 나오는 특별함을 좋아한다. 글 안에서 '멍멍이'라 부르는 건, 어린애도 아닌 이의 애교가 아니라 견주로서의 애정임을 짚고 넘어가겠다. (타인에게 말할 때는 당연 우리 집 멍멍이 말고 우리 집 강아지라 부른다.) ※


  아픈 멍멍이를 얼싸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늦은 밤, 엄마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너에게는 멍멍이만 중요한 거 같다, 멍멍이 챙기는 것처럼 가족들도 생각하라는 게 엄마의 요지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반성의 마음은 새싹의 한쪽 잎만큼 올라오지도 않았다. 멍멍이가 아파서 울음보가 터진 나를 다그칠 생각부터 하는 엄마가 미웠다. 이 말은 이후로도 몇 년간 불쑥불쑥 기억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전부터 이기적이라는 말을 종종 들어 왔다. 10대인 내 눈에 이기적인 사람들은 넘칠 정도로 들어왔으니 이 말 또한 의아했다. 남에게 관심이 없는 내 이기심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남에게 관심이 많은 이들의 이기심은 피해를 끼치고도 남았다.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냈으면서 상처를 준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저들 말고 왜 마음을 닫은 내가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답답했다.


  가족을 비롯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평가하는 데 재미가 들린 것 같았다. 이리 튀었다가 저리 튀었다가 하는 갖은 말들을 이겨내기에 당시 내겐 여과의 능력이 없었다. 모든 말을 수용하고 그 말에 내 모습을 대입하기 바빴다. 공감되는 말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말이 더 많았다. '나도 날 모르겠는데 저들은 무엇을 보고 날 판단할까?'란 의구심은 타인을 향한 경계로 바뀌어 갔다.




  최근 토일월 삼일동안 원치 않게 멍멍이와 떨어져 지냈다. 토요일 오전 중에 집을 나설 때부터, 월요일 저녁에 집에 들어오기까지 수시로 멍멍이가 보고 싶었다. 주말에는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핸드폰 안에서 움직이는 멍멍이의 생명력을 감상했다. 친구들과 놀러 갈 땐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가족(언니, 아빠)과 오니 마음껏 멍멍이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게 기쁘기도 했다.


  어느덧 멍멍이가 내 삶의 1순위를 꿰찼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멍멍이를 사랑하는 만큼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들에겐 나란 존재를 빼고도 <저마다의 삶과 인생>이 커다랗게 있다. 멍멍이는 나보다 한참은 늦게 태어났고 멍멍이의 기억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나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나와 꼭 달라 붙은 채 지내왔다. 여행 이틀차인 일요일에 멍멍이는 내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평소에는 잘먹으면서 내가 없다고 밥도 제대로 안 먹는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거워져만 갔다. 아빠와 언니의 충돌보다도 멍멍이의 기분이 내겐 더 큰 문제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멍멍이를 얼싸안으며, 몇 kg나 나간다고 며칠 사이 가벼워진 무게에 속상함이 밀려왔다. 자기를 내버리고 나돌아 댕긴 것에 대한 복수인지 멍멍이는 그날 밤, 나를 '개무시'하며 다른 가족에게만 기댔다.


  나는 너로 인해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구나!


  멍멍이와 영상 통화할 때는 미세한 움직임에도 함박웃음이 지어질 정도였다. 밥도 안 먹고 우울해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가슴에 큰 구멍이 난 거 같았다. 집에 올 시간이 다가오면서는 멍멍이를 볼 생각에 설렜고, 예상과 달리 반기지 않는 태도에 서운한 한편 그렇다고 화낼 수는 없으니 웃었다. 내가 2015년에 태어난 '어 강아지'의 세계가 된 것처럼, 멍멍이는 어느새 2001년에 태어난 '어떤 이'의 세계가 되었다. 누군가는 이러한 세계가 사랑하는 연인으로 인해, 혹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으로 인해 만들어진다. 또 다른 대상으로 인해 세계가 정립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테며 나는 그 생명체가 사람이 아니고 강아지일 뿐이다.



  

  이기적이었던 역사가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꼬꼬마 시절부터 혼자 있던 시간이 길었고 교우 관계도, 가족 관계도 좋게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이것저것 눈치 보는데 시간을 허비하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다. 동급생 "너는 목소리가 이상해"라는 말을 했을 때 '내가 목소리만 이상한가?'라는 의문들었다. 이곳저곳 다 이상해 보이면서도 지극히 평범해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착한 아이, 누군가에게는 싸가지 없는 아이, 누군가에게는 예쁜 얼굴, 누군가에게는 못난 얼굴.... 숱한 평가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간 채 "나는 무색무취야"라 말하고 다녔다. 그 말 안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란 자기 비하가 내재되어 있었다. 내게도 관심 없으니 남들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은 건 당연지사였다. 아빠, 엄마, 언니도 어느덧 남이 되어간 게 문제였지만. 세 사람은 추락하고 있는 나를 이끌어 주지 못했다. 하나 우리 가족의 마지막 구성원으로 편입한 멍멍이가 내 손을 붙잡아 주었으므로 나는 가족이 내게 끼친 숱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울타리> 안에 남아 있기를 택했다. 지난한 결핍이 모조리 채워졌기에 멍멍이를 통해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키워가는 건 현재 진행형이다.


  매거진의 제목이 부끄럽게도, 가족은 내게 있어 '애증' 중에서도 '증'이 더 강한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을 나갈 계획이었고, 자취를 감춤으로써 내 존재를 저들 안에서 없애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계획이 무너진 건 멍멍이가 내 삶에 너무 깊게 파고들어서였다. 멍멍이는 우리 가족 모두를 사랑한다. 내 사랑이 멍멍이의 사랑보다 좀 더 커서 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긴 하나... 나를 비롯해 아빠, 엄마, 언니에게 사랑을 골고루 나눠준다. 아빠와 일주일에 두 번밖에 못 본들, 언니와 몇 주에 한 번 꼴로 만난들 멍멍이는 모두를 반기고 모두에게 궁딩이를 찰싹 붙이며 기꺼이 눈 맞춤을 해준다. 멍멍이에게 우리 네 사람은 '동일한 가족'으로 보이나 보다. 멍멍이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면서 "네 뜻이 그러하다면 나도 너를 따르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


  공모전에서 심사위원 분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수식을 내 소설의 평가로 다셨다.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외톨이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글을 써낼 수도 있구나, 나는 확실히 바뀌고 있는 중이구나, 싶은 생경한 감정이 밀려왔다. 외톨이로 사는 삶도 나쁘진 않았다. 외로움을 달랠 요량이야 많았으니까. 하나 애정하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가족들을 향한 사랑도 나날이 커져가는 20대로서의 지금이 내게는 가장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 특별함을 만들어 준 멍멍이에게 치얼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포함한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

내 멍멍이, 내 사랑에게 치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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