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과참 Aug 30. 2023

에둘러서 말했을 때의 여운

[ㅔ] 에두르다
때로는 직설적인 말보다 더 큰 이해로 다가오나,
남발할 필요는 없음


悟 선생님. 선생님을 담임 선생님으로 만난 덕에 어색하다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선생님 앞에서는 쾌활하게 굴지도, 불필요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으니 어색함을 내내 이어나갈 수 있었지요. 담임 선생님들 중 悟 선생님이 떠오르는 빈도가 가장 잦은 걸 보면, 어색함 뒤에 숨어버린 내적 친밀감은 꽤나 깊었나 봅니다. 감성보단 이성이 어울리는 선생님에게 하필 눈물을 들킬 건 또 뭔지. 그래도 이후로 이성(理性)의 손도 같이 잡게 됐으니 이 또한 선생님 덕분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어후 '학교'란 공간을 네 군데나 거친 탓에 성적 그래프도 길다. 초등학생일 적엔 → 완만했다가 중학생 때 ↗ 찍었다가 ↘ 내려왔다. 고등학생 때는 ↘ 내려오기 바빴고 대학생이 돼선 성인의 무게를 실감하며 ↗ 다시 올린 후 → 로 유지하였다. 다른 모양이어도 별 상관은 없다. 최하 성적 자책하진 않았다. 최고점을 찍은들 기쁠 것도 없었다. 노력은 노력이고 <그래서 뭐?>란 시선으로 성적표를 차갑게 바라보곤 잊었다. 시험과 성적을 비롯해 학교라는 게 내 삶의 1순위가 아니라서 그랬다. 그런데도 학교는 내 일상을 앗아가고, 그런 학교에 시간을 갖다 바치는 현상은 나날이 심해지니 미간 주름도 진해져만 갔다.


  열다섯 살, 처음으로 '자퇴'란 단어를 확고히 말한 순간부터 학생 신분을 고 싶었다. 당연 목표에 실패했으니 대학까지 갔다. "칠칠이는 학교가 싫다면서 왜 그리 열심히 해?"라는 질문을 최근까지도 꾸준히 들었다. 매번 머리 굴리다가 헛웃음으로 매듭지었다. 할 말은 많은데 어중간하게 말할 경우 변명으로 들리리란 걸 알았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가 갖는 위세는 나이대를 불문하고 고정적이니까 이해받기 쉽지 않을 것도 알았다. 어찌 됐든 내 말의 무게감을 싣고 싶어서 그랬다. 허투루 다녀서 학교를 관두려는 게 아니라, 열심히 다녀도 학교 싫을 수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다.


  학교의 존재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학교란 공간이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올 뿐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시험이었다. 시험은 주기적으로 찾아왔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해하고 암기해야 될 거 같은데 양이 많으니 우선은 암기하고 어중간하게 이해하기 일쑤였다. 좋아하는 과목이든 싫어하는 과목이든 고사(考査)가 끝나면 암기 내용은 빠르게 휘발됐다. "이런 게 공부인가?" 싶은 회의감에 시달렸다. 머리를 꽉 채웠다가 비워내고 다시 채워가는 과정을 '공부'라고 명명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 신봉자들은 학교는 공부가 다가 아님을 지적했고 나도 인정하였다. 문제는 <학생의 임무는 공부>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거였다. 다른 임무를 찾고자 학생을 관두고 싶었다. 학생 신분이 아니어도 못나게 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자퇴가 소원이던 내 나이 15살에서 17살, 타인이 보인 반응은 지겹도록 비슷했다. 상대는 언제나 선생님들 아니면 부모님과 언니였다. 싸늘해진 눈빛과 높아진 목소리는 나를 겁 주기에 충분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자퇴가 잘못이에요? 그렇다 해도 아직 자퇴 안 했으니 잘못한 것도 아니고, 자퇴라는 제도를 제가 만든 게 아니니 못할 말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굴었다간 더 심한 소리 들을 게 분명하니 "옙" 하고 뒤돌아섰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 몰라도 내 안색은 어두워져만 갔다. 학교를 계속 다닌다 해도 학교와 공부가 내게 1순위가 될 일은 없었다. 거리감은 내가 늘리면 되었고 숨통 틀 구멍 만들기는 어릴 적부터 전문이라 괜찮았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열여덟 살 가을의 어느 날, 수업 내용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질 않았다. 내리 허공만 쳐다보다가 화장실로 가서 숨을 토해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학교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우는 날이 많았어도 내가 싫어하는 학교에서 우는 짓 따위는 안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학교에서마저 울게 된다는 끔찍한 예감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다음 시간은 이동 수업이었다. 짐 챙기는 대신 교무실에 들어갔다. 당시 담임이시던 悟 선생님에게 몸이 안 좋으니 조퇴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悟 선생님은 날 선생님 자리로 데려가시고는 선생님과 마주 보도록 작은 의자(* 학생이 앉는 용)에 앉히셨다.


  고등학교 입학 후 조퇴한 적이 한 번도 없긴 했으나, 자퇴도 아닌 조퇴 정도는 허락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굳이 내 상태를 설명할 필요 없이 에둘러 말해도 조퇴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눈물이 훼방을 놓았다. 교무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눈물을 글썽였고 얼마 안 있어 말 그대로 뚝-뚝- 흘렸다. 이때까지도 '화장실 가지 말고 교무실로 곧장 올 걸, 그럼 안 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했다.




  悟 선생님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달라고 하셨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에 스스로 당황하느라 쥐구멍을 못 찾아냈고 결국 입을 다물길 택했다. 悟 선생님은 놓아주지도 않으셨다. 내가 입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셨다. "학교를 관두고 싶어요" 솔직한 심정이 튀어나왔다.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또 한참의 정적이 흘렀다. "책을 읽고 싶어서요" 런, 가 내세우려던 이 아니었다.


  고등학교에선 등수 다툼이 더 심했다. 똑같이 열심히 하는데 한두 문제로 등급이 엇갈리는 희비 따위 겪고 싶지도, 목격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퇴 싸움> 끝에 공부에 매달리는 대신 책을 유난히 탐독했으나 시험 기간에 한해선 책을 읽지 않았다. 몇 주만이라도 독서를 참으며 인강 듣고 문제 풀고자 한 건데 이로 인해 스트레스는 쌓여 갔다. 悟 선생님은 "책은 학교 다니면서도 읽을 수 있잖니"라고 답하셨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 나는 계속해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윽고 悟 선생님 혼자 담담하게 얘기하셨다. 悟 선생님의 일화가 비밀인지 밝혀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으니 이 부분은 생략하겠다. 눈물의 원인이던 답답함은 어느 정도 풀어졌다. 학교를 관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 당연히 뒤따라 올 줄 알았던 반응을 겪지 않아서였다. 생채기가 하나 더 생기겠거니 각오했건만 선생님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지도, 닦달하지도, 혼내지도 않으셨다. 내 말에 공감은 안 하셨지만 그렇다고 비난도 안 하시며 에둘러 표현하셨다. "조퇴증 써 줄 테니 쉬고 오렴" 시간이 한참 흘렀음에도 悟 선생님에겐 지친 기색 또한 느껴지지 않아 마음이 쓰라렸다. 그렇게 조퇴증을 손에 꼭 쥔 채 집에 돌아왔고 다음 날 등교했다. 교무실 먼저 찾아가 悟 선생님에게 사과 두 알을 건네드렸다. 그다음 날인가 전날이 학교 연례행사인 사과 데이였으리라. 사과 데이에는 편지 필수인데 편지를 못 쓴 대신 사과를 한 알 더 챙긴 거였다. 悟 선생님은 "편지는?"이라고도, "사과가 무슨 의미니?"라고도 물으시지 않고, 웃으시면서 "고맙다"라고 하셨다.


  悟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이셨지만 나와는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다. 자주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보통 때는 조용하시다가 몇몇 친구들 앞에서만 튀어 나오는 悟 선생님의 농담을 들으면몰래 웃는 학급생이었다. '선생님'이란 존재가 그러하 특히 담임 선생님은 동창생들과의 대화에서 소환될 때가 잦다. 학생들의 감정이 한 방향을 보일 수 없다. 친구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 있는 의견이 듣는 내가 추궁할 필요 없다. 다 듣고 고개를 끄덕 뿐이다. 다만 悟 선생님이 거론될 때면 '공감의 귀'시 닫게 된다. 오르는 상념들이 많아서다.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현장 체험 학습 때 찍은 사진입니다. 悟 선생님과 어울리는 장소였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이들아, 너네는 최고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