悟 선생님. 선생님을 담임 선생님으로 만난 덕에 어색하다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선생님 앞에서는 쾌활하게 굴지도, 불필요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으니 어색함을 내내 이어나갈 수 있었지요. 담임 선생님들 중 悟 선생님이 떠오르는 빈도가 가장 잦은 걸 보면, 어색함 뒤에 숨어버린 내적 친밀감은 꽤나 깊었나 봅니다. 감성보단 이성이 어울리는 선생님에게 하필 눈물을 들킬 건 또 뭔지. 그래도 이후로 이성(理性)의 손도 같이 잡게 됐으니 이 또한 선생님 덕분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어후 '학교'란 공간을 네 군데나 거친 탓에 성적 그래프도 길다. 초등학생일 적엔 → 완만했다가 중학생 때 ↗ 찍었다가 ↘ 내려왔다. 고등학생 때는 ↘ 내려오기 바빴고 대학생이 돼선 성인의 무게를 실감하며 ↗ 다시 올린 후 → 로 유지하였다. 다른 모양이어도 별 상관은 없다. 최하 성적에 자책하진 않았다. 최고점을 찍은들 기쁠 것도 없었다. 노력은 노력이고 <그래서 뭐?>란 시선으로 성적표를 차갑게 바라보곤 잊었다. 시험과 성적을 비롯해 학교라는 게 내 삶의 1순위가 아니라서 그랬다. 그런데도 학교는 내 일상을 앗아가고, 그런 학교에시간을 갖다 바치는 현상은 나날이 심해지니 미간 주름도 진해져만 갔다.
열다섯 살, 처음으로 '자퇴'란 단어를 확고히 말한 순간부터 학생 신분을 벗고 싶었다. 당연 목표에 실패했으니 대학까지 갔다. "칠칠이는 학교가 싫다면서 왜 그리 열심히 해?"라는 질문을 최근까지도 꾸준히 들었다. 매번 머리 굴리다가 헛웃음으로 매듭지었다. 할 말은 많은데 어중간하게 말할 경우 변명으로 들리리란 걸 알았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가 갖는 위세는 나이대를 불문하고 고정적이니까 이해받기 쉽지 않을 것도 알았다. 어찌 됐든 내 말의 무게감을 싣고 싶어서 그랬다. 허투루 다녀서 학교를 관두려는 게 아니라,열심히 다녀도 학교가 싫을 수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다.
학교의 존재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학교란 공간이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올 뿐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시험이었다.시험은 주기적으로 찾아왔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해하고 암기해야 될 거 같은데 양이 많으니 우선은 암기하고 어중간하게 이해하기 일쑤였다. 좋아하는 과목이든 싫어하는 과목이든 고사(考査)가 끝나면 암기 내용은 빠르게 휘발됐다. "이런 게 공부인가?" 싶은 회의감에 시달렸다. 머리를 꽉 채웠다가 비워내고 다시 채워가는 과정을 '공부'라고 명명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 신봉자들은 학교는 공부가 다가 아님을 지적했고 나도 인정하였다. 문제는 <학생의 임무는 공부>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거였다. 다른 임무를 찾고자 학생을 관두고 싶었다. 학생 신분이 아니어도 못나게 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자퇴가 소원이던 내 나이 15살에서 17살, 타인이 보인 반응은 지겹도록 비슷했다. 상대는 언제나 선생님들 아니면 부모님과 언니였다. 싸늘해진 눈빛과 높아진 목소리는 나를 겁 주기에 충분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자퇴가 잘못이에요? 그렇다 해도 아직 자퇴 안 했으니 잘못한 것도 아니고, 자퇴라는 제도를 제가 만든 게 아니니 못할 말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굴었다간 더 심한 소리 들을 게 분명하니 "옙" 하고 뒤돌아섰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 몰라도 내 안색은 어두워져만 갔다. 학교를 계속 다닌다 해도 학교와 공부가 내게 1순위가 될 일은 없었다. 거리감은 내가 늘리면 되었고 숨통 틀 구멍 만들기는 어릴 적부터 전문이라 괜찮았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열여덟 살 가을의 어느 날, 수업 내용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질 않았다. 내리 허공만 쳐다보다가 화장실로 가서 숨을 토해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학교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우는 날이 많았어도 내가 싫어하는 학교에서 우는 짓 따위는 안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학교에서마저 울게 된다는 끔찍한 예감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다음 시간은 이동 수업이었다. 짐 챙기는 대신 교무실에 들어갔다. 당시 담임이시던 悟 선생님에게 몸이 안 좋으니 조퇴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悟 선생님은 날 선생님 자리로 데려가시고는 선생님과 마주 보도록 작은 의자(* 학생이 앉는 용)에 앉히셨다.
고등학교 입학 후 조퇴한 적이 한 번도 없긴 했으나, 자퇴도 아닌 조퇴 정도는 허락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굳이 내 상태를 설명할 필요 없이 에둘러 말해도 조퇴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눈물이 훼방을 놓았다. 교무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눈물을 글썽였고 얼마 안 있어 말 그대로 뚝-뚝- 흘렸다. 이때까지도 '화장실 가지 말고 교무실로 곧장 올 걸, 그럼 안 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했다.
悟 선생님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달라고 하셨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에 스스로 당황하느라 쥐구멍을 못 찾아냈고 결국 입을 다물길 택했다. 悟 선생님은 놓아주지도 않으셨다. 내가 입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셨다. "학교를 관두고 싶어요" 솔직한 심정이 튀어나왔다.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또 한참의 정적이 흘렀다. "책을 읽고 싶어서요" 이런, 내가 내세우려던 말이 아니었다.
고등학교에선 등수 다툼이 더 심했다. 똑같이 열심히 하는데 한두 문제로 등급이 엇갈리는 희비 따위 겪고 싶지도, 목격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퇴 싸움> 끝에공부에 매달리는 대신 책을 유난히 탐독했으나 시험 기간에 한해선 책을 읽지 않았다. 몇 주만이라도 독서를 참으며 인강 듣고 문제 풀고자 한 건데 이로 인해 스트레스는 쌓여 갔다. 悟 선생님은 "책은 학교 다니면서도 읽을 수 있잖니"라고 답하셨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 나는 계속해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윽고 悟 선생님 혼자 담담하게 얘기하셨다. 悟 선생님의 일화가 비밀인지 밝혀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으니 이 부분은 생략하겠다. 눈물의 원인이던 답답함은 어느 정도 풀어졌다. 학교를 관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 당연히 뒤따라 올 줄 알았던 반응을 겪지 않아서였다. 생채기가 하나 더 생기겠거니 각오했건만 선생님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지도, 닦달하지도, 혼내지도 않으셨다. 내 말에 공감은 안 하셨지만 그렇다고 비난도 안 하시며 에둘러 표현하셨다. "조퇴증 써 줄 테니 쉬고 오렴" 시간이 한참 흘렀음에도 悟 선생님에겐 지친 기색 또한 느껴지지 않아 마음이 쓰라렸다. 그렇게 조퇴증을 손에 꼭 쥔 채 집에 돌아왔고 다음 날 등교했다. 교무실 먼저 찾아가 悟 선생님에게 사과 두 알을 건네드렸다.그다음 날인가 전날이 학교 연례행사인 사과 데이였으리라. 사과 데이에는 편지가 필수인데 편지를 못 쓴 대신 사과를 한 알 더 챙긴 거였다. 悟 선생님은 "편지는?"이라고도, "사과가 무슨 의미니?"라고도 물으시지 않고, 웃으시면서 "고맙다"라고 하셨다.
悟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이셨지만 나와는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다. 자주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보통 때는 조용하시다가 몇몇 친구들 앞에서만 튀어 나오는 悟 선생님의 농담을 들으면서 몰래 웃는 학급생이었다. '선생님'이란 존재가 그러하나 특히 담임 선생님은 동창생들과의 대화에서 소환될 때가 잦다. 학생들의 감정이 한 방향을 보일 수는 없다. 친구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 있는 의견이니 듣는 내가 추궁할 필요도 없다. 다 듣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다만 悟 선생님이 거론될 때면 '공감의 귀'를 잠시 닫게된다. 떠오르는 상념들이 많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