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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31. 2023

여지껏 열여덟을 놓지 못하는 사정

[ㅕ] 여지껏
과거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데다
미래까지 짐작하게 만드는 시간 표현


悟 선생님, 이는 추신입니다. 이때의 기억들은 불현듯 떠오르기보다는 그림자마냥 변함없는 자리에 있어요. 기억이라는 게 본래 그런 특성도 지니는 법이니 개의치 않아 했습니다. 그러다 글로 옮겨 적으려니 퍽 힘이 들어 당황했습니다. 기억은 과거이지만 그 기억이 새겨지는 데 영향을 미친 더 이전의 과거와, 그 기억을 곱씹는 현재와 앞으로도 잊지 못할 미래까지 그려져서 그런 듯해요. 다른 기억도 아니고 깨달음이 따라오는 기억이라서요. 悟 선생님이 담당하시는 과목이 제게 수시로 깨달음을 주기도 했으니... 신기합니다.


  <여태껏>, <여지껏> 두 표현 모두 마음이 쓰이기는 매한가지다. 사전에는 명확한 정의가 나오지 않기에 뜻을 찾으려면 스스로의 언어생활을 돌아보아야 해서다. <여태껏>은 <여태>라는 말에 <-껏>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표준어가 되었으니 그나마 낫다. 반면 <여지껏>은 <여직>이란 말과 함께 표준어 취급을 못 받으니 억울해 보인다. 이를 파헤칠 전문 지식이 없는 내 언어생활만으론 <여지껏>의 무게를 헤아릴 수 없다.


  24시간 동일한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도 새겨지는 기억의 깊이는 다르다. 어느 날의 기억은 수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지만, 어느 날의 기억은 불현듯 소멸되어 버리고, 또 어느 날의 기억은 어디 숨어 있던 건지 무심코 튀어나온다. 기억의 오묘한 영향력은, 기나 긴 시간을 담아낼 수 있으나 근원이 모호한 <여지껏>이란 표현과 닮아 보인다. 서로 어울리기도 하다. 여지껏 기억하지 못했다. 여지껏 기억하고 있었다.... 국문법 전문이신 悟 선생님에게 설명을 듣고 싶어 진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수학여행이라는 거대 행사가 학생들의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2023년을 기준으로 제주도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당시 제주도 대신 가까이 있는 타 국가가 수학여행 장소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해외는 안 된다는데도 승낙을 받기 위해,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까지 한 친구들이었다. 단결(團結)한 마음 앞에 한숨이나 내쉴 순 없었다. 참가 확인 사인이 필요한 안내문을 받고 한참을 고민했다. "수학 여행비가 비싸서 못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지만, 학생들처럼 학교에서도 단결을 내세웠다. 관광 말고 수학(修學)이 목적인 데다 저가 항공과 저가 숙소를 이용해 금액은 괜찮게 측정되긴 했다. 내게는 안 괜찮아 보였을 뿐.


  며칠 후, 悟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오라 하셨다. 개인 후원자에게 수학 여행비에 상응하는 금액을 받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후원금을 받기까지의 절차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후원자님에게 손 편지를 써야 했고, 담임이신 悟 선생님이 검수하시기도 하였다. 편지지 앞에서 호강에 겨운 골머리를 앓았다. 아빠와 따로 산 세월이 같이 산 세월을 능가한 지 오래인 때였다. 경제적으로도 엄마 홀로 양육한 거나 다름없는 유년을 보냈다. 어찌 됐든 아빠와 엄마가 법적 부부이기에 지역에서든 학교에서든 복지를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개인 후원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悟 선생님께선 내 투정에 신경을 써 주신 거였다. 차라리, "수학여행 가고 싶지 않으니 학교에 남아 있겠습니다"라고 다른 고백을 내질러야 했다. 이 금액을 들여 가는 건 손해라 생각했기에 수학 여행비가 문제인 건 맞았지만 최종적으로 돈의 무게를 짊어지는 건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후원 명목의 '장학금'을 수학 여행비 보내야 하는 학교 계좌 대신 내 개인 통장에 보냈다. 엄마 돈으로만 수학 여행비를 입금하. 후원이라는 게 엄마한테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던 걸까? 悟 선생님과 엄마, 두 어른이 신경 쓰시게 만든 건 물론, 나 말고 장학금이 중한 학생이 분명 있을 텐데 괜히 내 어리석은 고백에 후원비가 잘못 전달된 것 같아 자책감이 일었다. 여러 사람이 얽힌 자책은 여지껏 날 불편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은 내가 감수할 몫이다.




  2018년도에 담임이시던 悟 선생님은 2019년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다른 학교로 가셨다. 우리 반 학생들은 소식을 미리 듣지 못했다. 방학 중, 떠나시는 선생님들 배웅에 悟 선생님 계신다는 데에 단톡방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인사드리러 갈 학생들과, 일이 있어 못 가는 데에 아쉬워하는 학생들의 마음이 텍스트로 오갔다. 나는 다녀오길 택했다.


  꽃다발이라도 드려야 할 거 같아 집 앞 꽃집을 찾아갔다. 문제는, 꽃의 시세며 꽃다발의 가격을 알지 못한다는 거였다. 지갑에 현금으로 2만 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격 확인 차 앞에 있는 빈약한 꽃다발을 가리켰더니 만 원이라고 하셨다. '어우, 꽃들 직접 골랐간 큰일 날 뻔했네'  내가 상상한 꽃다발은 아니었지만 완성되어 있는 건 그뿐이라 달라하였다.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고등학교는 집에서 버스로 50분은 걸렸는데, 그 시간 동안 꽃다발바라보면서 "에잇, 이게 뭐야!" 툴툴거렸다. 큰 꽃도 멕아리가 없어 보였고, 주변에 있는 작은 풀은 듬성듬성하니  꼴불견이었다. 빈손이 아니라는 데에 위안을 두려고 했지만 친구들이 손에 들고 온 풍성한 꽃다발을 보자 '차라리 사 오지 말 걸' 좌절하였다. 悟 선생님에게 내밀면서도 멋쩍은 마음에 말을 버벅거렸다. 지금 같으면 너스레라도 떨었겠지만 아직 고2인 당시의 나는 그런 걸 몰랐다.


  담임 선생님으로 뵈었으니, 悟 선생님에게 편지 쓴 적이 있긴 하다. 다른 학교로 발령받으실 줄 몰라서 겨울 방학식 때 일찌감치 드렸다. 편지에 무슨 말을 적었는지놀랍도록 기억에 없다. 확실한 건 초중고 도합 12년을 통틀어 편지의 내용보다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인 건 悟 선생님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점이. 지금도 편지 쓸 때 백색의 종이에 흑색의 글씨를 채우지, 기교를 부리지는 않는다. 지난 글에서 서술했듯, 悟 선생님과는 "쌤~~ 선생님~~" 하고 매달릴 만큼 가까운 사이 아니었다. 그래서 悟 선생님의 편지에 내용 대신 겉모습을 신경 쓴 게 아닐까 싶다. 내용은 다른 학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도 죄송한 게 많은 선생님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티 내고 싶었나 보다.


  고등학교 2학년인 내게는 너스레도 없었지만 솔직함이란 것도 없었던 모양이다. 이래서 죄송했고 이래서 감사했다, 말씀드리면 될 걸 그러지 못했다. 제일 쉬운 방법을 놔두고 사과 두 알, 수프 한 팩(* 맛있어서 드렸는지 실수를 저질러 드렸는지 불분명하다), 알맹이 없는 편지, 이상한 꽃다발을 내밀며 마음을 감추었다. 친하지는 않았더라도 悟 선생님과 관련된 기억은 다른 기억들보다 유독 선명하다. '떠오른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상시 머릿속에 들어차 있다. 悟 선생님의 보살핌에 제대로 된 인사를 못 드린 게 여지껏 신경이 쓰이는데.... 현재는 제일 쉬운 방법도 써먹을 수 없으니, 이번에도 빙빙 둘러 표현하게 됐다. 悟 선생님, 뒤늦은 사과보다 확실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悟 선생님은 제게 깨달음(悟)이 가미된 '감동'이었습니다.


悟 선생님, 수학 여행 때 바다가 이 정도로 푸르렀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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