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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01. 2023

사랑하고 싶은 언니에게 씁니다

  언니가 일전에 보낸 산리오 굿즈 사진이 꽤나 자주 떠올랐어. 나야 산리오 캐릭터에 별 관심이 없으니 갖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 이중에 무얼 원하는지 물어보는 언니의 행동에서 아빠의 모습이 겹쳐 보였거든. 아빠가 딱 그랬잖아. 자식들 키우는 데 필요한 돈에는 나 몰라라 하면서 입에 맛난 음식은 잘도 넣어줬지. 그 때문에 조그맣던 시절부터 참 혼란스러웠어. 아빠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우리에게만 좋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이라면 그런 아빠를 사랑하는 나는 좋은 사람인 걸까?


  나와 마주하는 실제의 사람들은, 동화 속 인물들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눠질 수 없다는 걸 늦게 알았어. 그 때문에 자라면서도 언니와 아빠를 나쁜 사람이라 정의 내리고는 등 돌리려 했지. 휴대폰 번호를 바꾸면 두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을 거고 평생 찾지도 않을 거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순간이 없었어. 언니와 아빠는 왜 변하지 않을까? 남에게 상처 주는 걸 왜 저리 일삼는 걸까? 나와 엄마도 완전무결하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 하지만 두 사람은 이해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나빠 보였거든.  


  언니와 달리 나는 아빠를 용서했어. 이제는 아빠엄마가 내게 어떻게 나온들 나는 더 이상 두 분을 미워하지 않을 거야. 언니에게도 누누이 말했지만 부모님은 삽시간으로 늙어가며, 잘하든 못하든 우리는 지독한 후회를 앓을 테니까. 부모님에게는 당시가 길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나는 내가 부모님을 미워한 세월이 결코 길다고 보진 않아. 뱃속에서부터 불행이라 취급받던 애가 어른 둘 미워한 게 뭐 그리 큰 일이겠어. 하지만 그 길지 않은 시간조차 나는 후회하고 있어. 바꿔 말하자면 나는 나를 위해 달라지기로 한 거야. 내가 덜 힘들기 위해서 미움마저 사랑으로 바꾸려는 거야. 그렇다고 나의 사랑을 불결하다 생각하진 않아. 부모님의 사랑도 의심하지 않기로 했고. 작은 의심도 아까울 만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의 애달픔을 알았으니까.


  그런데 언니에게는 힘드네. 언니를 용서한 거 같다가도 아직 용서 못 한 것도 같아서 언니를 향한 감정을 뭐라 종잡을 수 없어. 아빠와 엄마에게는 지난주에 편지 써놓고선, 언니한테는 이제야 쓰는 이유가 이 때문이야. 언니는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가 더 많은 사람이지. 한때 내 머릿속에서 날 좀먹던 악한 말들은 거의 다 언니의 입에서 튀어나왔지. 언니가 날 쥐 잡듯 패던 유년 시절은 언니 말대로 과거일 뿐이고, 이제는 그 과거에 휘둘리지도 않는데 언니를 완전히 용서하는 일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아니, 나는 이유를 알고 있어. 그래서 언니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거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언니가 달라져야 돼. 변하지 않은 이에게 용서를 건네봤자 불행은 되풀이될 뿐이야. 언니와 엄마가 싸움을 그치지 못하는 이유도 둘 중 한 사람인 언니가 변하지 않아서라는 걸 이제는 깨달아야 해. 외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엄마에게 언니와의 연을 끊을 것을 오래도록 종용해 왔어. 언니는 어릴 때부터 '말썽쟁이'라는 말로 표현이 안 될 만큼 사고를 많이 저질렀고 중학생이 돼서는 엄마를 아예 숨 막히게 했잖아. 언니야 문을 쾅 닫고 있어서 모르겠지만, 나는 한 걸음 뒤에 서서 괴로워하던 엄마를 날마다 지켜봐야 했어. 둘 중 한 사람이 죽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나날이었지. 언니가 날 괴롭힌 과거는 잊을 수 있지만 엄마를 아랫사람 취급하던 과거는 잊지 못해.


  언니는 늘, 남들에게는 그리 착하면서 왜 언니한테만 싸가지 없이 구냐고, 날 양면을 지닌 사람처럼 취급하지. 나는 부모님이 하지 못하는 말들을 대신해서 할 뿐이야. 내 말들이 언니에게 상처만 준다면 나도 입을 다물겠지. 내 말이 진정 상처라면 언니는 내가 한 말들을 잊지 못해야 해. 그런데 내 말을 듣고 찔려하고, 찔리다 못해 화까지 내면서도 다음 날이면 잊어버리잖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도 아끼고 있는 거야. 언니처럼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도 아니고 실체 없는 말을 할 뿐인데도, 그 말에 언니가 날뛸까 봐 엄마가 두려워하고 있으니. 엄마는 오랜 세월 언니를 참아왔고 참고 있어. 같이 살지도 않는 친척들이 언니를 몇 개월에 한 번 보고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 말에 기댈 게 아니라, 엄마가 언니와 같이 있는 순간을 편히 여기고 있는지를 살펴야 해. 언니가 달라지는 순간이 오면 나도 언니를 대놓고 사랑해 볼게.

 

  언니는 중학생 때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지. 나는 언니의 말을 통해, 가족 사이에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 언니에게 맞다가 울음보 터뜨리는 게 일상이던 때도 언니를 미워하질 않았는데. 언니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니 나도 당당히 언니를 싫어할 수 있었지. 그런데 언니는 이제 날 때리지도 않고, 모진 말을 안 하려고 노력하고도 있지. (갈 길이 멀지만 언니는 확실히 변하고 있어.) 언니가 이제는 날 동생으로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어 볼게. 사랑하지도 않는 동생에게 누가 기프티콘을 보내고 온갖 물건을 사다 주겠어.


  나는 언니가 더 이상 무섭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 사랑할 수 있어. 그런데 언니가 화낼 때면 숨을 못 쉬겠다? 내게든 부모님에게든 버럭, 소리 지르는 순간 심장박동이 이상해져서 숨이 막혀 와. 엄마가 겪던 증상이 나한테 옮겨 온 거지. 언니가 진정 바뀌길 바라. 그래야 내가 언니 곁에 오래 남아 언니를 위해 글도 고쳐주고 밥도 해주지. 엄마가 기어이 언니를 내치지 못하니 나도 엄마의 뜻을 따라서 언니 곁을 떠나지는 않을 거거든. 그러니 언니도 우리에게 친절이라는 걸 베풀었으면 좋겠어. 듣기 싫어도 들어줘. 연 끊을 사이면 굳이 입 아픈 말을 왜 하고 있겠어.


  나는 언니를 사랑할 거라고 미래형으로 말하고 있지만, 언니는 <나의 언니>니까 이 편지 곳곳에 묻어 있는 애정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어.


  -구 큰 바위얼굴, 현 칠칠이가


언니가 내게 보낸 사진. 이디야에서 나온 산리오 굿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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