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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정 May 17. 2023

나의 우울이 너에게 - 친구 소개

너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셋이 쓰는 편지]

온 집안이 잠들어 고요한데 이 글을 적는 키보드 소리만이 정적을 이따금씩 깨고 있어. 한글은 기역, 니은도 아직 모르는 네가 읽을 편지를 적느라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려본다. 

겉모습만 빼고 모조리 날 닮은 네 성격이라면, 언젠가 나처럼 너 자신과 널 낳은 사람에 대해 궁금한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날이 오면 이 편지들을 묶어 너에게 보여주려고 해. 읽을지 말지는 너의 자유야. 네가 읽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계속 써나갈 계획이다. 이 편지는 너에게 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과거에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보내는 글이거든. 결과적으로 총 세 명의 여자가 이 글을 쓰고 읽고 하게 되겠구나. 셋이서 손을 포개고 파이팅이라도 외쳐야 할 것 같은 밤이다.



[끼리끼리]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많이 쓰이는 방법은 그 사람의 친구를 살펴보는 방법이야. 그래서 아마 나도 네 친구들을 많이 궁금해하게 되겠지. 늘 너에게 네 친구 이야기를 전해 듣던 내가 오늘은 내 친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시절인연이라고 들어봤니? 원래는 불교용어인데 속세에서는 잠시 한 시절을 함께하는 인연이라는 뜻 정도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내 모든 친구관계를 정의하는 데 있어 이 단어가 가장 적당하겠다 싶어 꺼내보았어. 

난 친구 사귀기가 어려운 만큼 그 친구와의 인연을 이어나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어. 그래서 모든 인연들이 그저 시절을 함께하는 동안만 유지되고 시절이 끝나면 인연도 흐지부지 되어 버렸지. 공황장애가 생긴 후로는 더욱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인간관계라는 게 온라인으로만 연락하면 되는 게 아니라 오프라인으로도 만나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해야 유지되는 거잖아. 그런데 난 번화가에 나서면 공황발작이 밥 먹듯 일어나니 만날 약속을 선뜻 하기가 쉽지 않았어. 상대 쪽에선 나에게 공황장애가 있다는 걸 알아도 그 질병의 특성에 대해 잘 모르니 그저 내가 친구관계에 소홀한 사람이라고만 생각을 했지. 그래서 공황장애가 생기기 전 알던 친구들은 공황장애가 생기고 난 후 거의 다 연락이 끊어졌고, 공황장애가 생기고 나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니 주변에 친구라곤 남아있질 않았어. 

그런데 그런 내게 끈질기게 남아있는 친구가 하나 있어. 그 친구를 오늘 소개하려고 해. 이 친구는 아마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함께 했던 것 같아. 전문적으로 진단받은 건 한참 후의 일이지만 말이야. 눈치챘겠지만 이 친구는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병이야.



[우울이랑 친구를 왜 해?]

어린 시절에는 우울이 내 곁에 와 있다고 생각지 못했어. 난 남들보다 좀 많이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구나 생각을 했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것은 우울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말이야. 좀 더 커서 중고등학생 시절엔 늘 우울하다고 생각했어. 그때는 사춘기 시절이라 나 말고도 모든 여자애들이 '아, 우울해.'를 입에 달고 다녔거든. 그래서 나만 특별히 더 우울한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 문제는 대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어.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에 살게 된 나에게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는 일탈을 불러왔고 평소 건강하지 못했던 내 몸과 마음은 아주 작은 일탈도 버티지 못했어. 일탈이라고 해봐야 소주 한 두 병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밥 대신 컵라면을 자주 먹은 것뿐이었는데 위장이 금세 망가져버렸어. 정확히는 망가지려 하는 순간이었지. 

배가 좀 아픈 걸로 갑자기 이 세상 모든 것이 두려워졌고 과거는 슬펐고 미래는 불안했어. 작은 병원으로 시작해서 대학병원까지 찾아다니며 별의별 검사를 다 해봐도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주 경미한 위염 정도가 내 병명이었어. 대체 내가 왜 아픈 건지 이유를 찾아서 고치고 싶었는데 어떤 의사도 원인을 밝혀주지 못했어. 먹지 못하고 잠들지 못한 채로 하루 24시간이 흐르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던 시절이었다. 

그때 손을 내민 게 우울이었어. 지금에야 손을 내밀어 주었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그 당시 느낀 우울의 모습은 온통 검은 얼굴을 한 그림자 같았어. 내 발목을 꼭 쥐고 따라다니는 족쇄 같은 그림자. 그 그림자를 떼어내야겠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내과에서 헤맨 시간이 어리석게 느껴졌고 하루빨리 정신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 싶었어. 그때만 해도 정신과에 대한 이미지가 꽤나 안 좋을 때라서 진료를 받기 위해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다. 그렇게 첫 발을 들여서 시작된 진료기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엔 아마 그 기록은 이미 멈춰있지 않을까 생각해.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늘 우울과 함께일 거야. 왜 우울 같은 것과 친구를 하냐고 묻고 싶겠지? 나도 처음에 우울을 발견했을 땐 이걸 친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어. 몸에 붙어있는 혹처럼 내 정신을 괴롭히는 불순한 생각 같은 거라고 여겼지. 단순히 의학적으로 접근한다면 그저 없애야 할 질병일 뿐이겠지만 우울은 생각만큼 단순한 친구가 아니더라. 

매일을 우울과 함께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야. 우울은 나를 쉽게 무기력에 빠뜨리고, 사소한 일도 짜증스럽게 만들고, 눈물샘은 수없이 가격하지. 평범한 일상을 해내는데 남들보다 두 배, 세 배의 에너지가 필요해. 한동안은 타고난 기질이 원망스러운 때가 있었어. 지금도 너를 키우면서 우울이 방해가 될 때면 원망을 하지.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우울과 함께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해. 나쁜 습관은 몸에 착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울도 그런 것일까.



[우울은 나를 글 쓰게 한다]

한동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어. 그 말을 빌려 말하자면, 우울은 나를 글 쓰게 한다. 우울은 나를 종종 심연으로 끌고 가줘. 그럼 나는 그곳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그 생각들을 다듬어서 한 편의 글을 써 내려가곤 해. 내가 쓰는 글들은 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아성찰적인 글들이 대부분인데 아직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다 살펴보지 못해서 그렇단다. 우울과 함께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모르는 나의 어린 모습들이 새록새록 나타나. 그럼 나는 그 모습들을 알아차리고 예쁘게 잘 보살펴 준 다음 과거로 다시 흘려보낸다. 허겁지겁 어른이 되느라 마구잡이로 쌓아왔던 벽돌들을 하나씩 뽑아서 차곡차곡 튼튼히 쌓는 작업이라고 보면 되겠다. 벽돌을 다 뽑아서 다시 쌓았는데도 여전히 삐뚤빼뚤이면 어떡하지. 뭐, 어쩔 수 없지. 그냥 그런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너와 나, 그리고 과거의 나 이렇게 셋이서 앉아 함께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 

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그땐 너에게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때는 우울의 색깔이 온통 검은색이 아니라 잿빛이나 비둘기색 정도로 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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