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지옥

케첩 한 통의 TMI

by Sam Giller


집에 케첩이 떨어졌다.

두어 달쯤 전에 이미 바닥났는데 패스트푸드에 따라오는 케첩들을 뜯어먹으며 버텨왔다.





장보기앱을 켜고 케첩 검색. 마트에서 흔히 보이는 제품들, 외국 브랜드, 저당 제품, 유기농 제품까지 끝없는 목록. 흔한 제품 몇 개를 눌러 주원료인 토마토의 원산지를 확인해 본다. 역시나 중국산. 이탈리아산 토마토로 현지에서 생산했다는 제품도 있는데 농축토마토에 물 섞은 거라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맨 아랫줄에 뜬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광고를 누르는 게 자존심 상하지만 특이한 이름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Hela. 이건 토르의 누나 이름인데? 지옥에서 온 케첩인가. 아스가르드 다 무너뜨리고 묠니르까지 파괴했던, 오딘이 깊은 곳에 봉인했던 빌런. 그녀 이름은 Hela.



상세페이지를 빠르게 스크롤해 보니 독일의 국민제품이라는 위풍당당한 설명. 커리부어스트의 그 소스맛. 커리파우더가 들었으니 혹시 아이가 먹기에 맵지는 않을까 제일 먼저 걱정된다. 남편이 좋아할 거 같기도 하고 원래 케첩에는 카다멈 같은 향신료가 소량 들어가니 독일인들이 즐길 정도라면 맵지는 않을 것이라는 추론에 일단 장바구니에 추가.


리뷰를 빠르게 훑는다. 논문이라도 쓸 기세로 빼곡하게 적힌 글들은 대부분 가짜다. 그중에 진짜를 찾아내고 이상한 쾌감을 느끼는 나. 짧고 거칠게 적힌 리뷰를 발견. '맵고 시기만 한 거지 같은 소스보다 낫다'는 글에 도움돼요를 눌렀다. 그리고 결제했다.







독일어 이름 hela는 "밝은, 환한"의 뜻이다. 마블의 토르를 좋아하는 나에겐 지옥으로 읽히고.

북유럽 신화에서 Hel은 로키의 딸, 죽은 자들의 나라(Hel)를 다스리는 존재이다. 영어 hell의 어원이다.

독일어 hell은 라틴어/게르만 어근에서 온 "빛, 밝음" 계열이고 북유럽의 Hel은 "숨겨진 곳, 저세상"을 뜻하는 원시 게르만어 계열이다. 같은 게르만 어족이라 발음은 비슷한지만 뜻은 정반대.



커리부어스트에 대해 알아보니 부대찌개랑 비슷하다. 2차 대전 직후 1949년 서베를린의 한 여성이 영국 군인한테 얻은 우스터소스와 커리파우더를 케첩에 섞어 소시지에 뿌린 것이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마블이 북유럽 신화를 그들만의 세계관으로 각색했고 전쟁 직후 먹을 게 없던 사람들은 새로운 재료를 그들 입맛에 맞게 재탄생시켰다. 영화에서는 크리스 헴스워스가 토르를 연기했지만 북유럽 신화에서는 붉은 수염을 가진 호탕한 근육 아저씨라는 사실. 햄은 싫지만 김치 넣은 칼칼한 부대찌개 국물은 좋아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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