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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Jul 13. 2022

지나갈 것들은 지나가고

장맛비를 바라보며 

나는 장마철에 태어났다.

그래서 생일날이면 곧잘 비가 주룩주룩 내리곤했다.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생일이 적잖이 싫었다. 특히나 장마철의 굵은 빗방울은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기 참 좋았다.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위에서 아래로 찍어누르는 듯한 거센 빗방울은 생일이라는 사실을 무참하게도 망가뜨렸다. 그래서 나는 내 생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한 번은 생일에 무자비하게 비가 퍼부었다. 생일이라고 축하를 특별히 하지도 않을만큼의 나이인지라 그 날도 퍼붓는 비만 원망하면서 학교에 갔다. 생일인데 교복을 입고 축축해진 양말을 신고 등교를 하는 기분이 퍽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산에 구멍이 났다. 머리 위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을 맞고 있자니 갑자기 기분이 무척 서글퍼졌다. 비와는 아무 상관없지만 폭력적인 아버지때문에 겪은 고생, 지독한 가난 등 그 당시 인생의 모든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그 당시의 내가 겪기에는 꽤 무거웠던 인생과 생일에도 비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맺혔다. 그 바람에 나는 선 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빗소리가 워낙 시끄러워서 우는 소리 정도는 가볍게 묻혔다. 차가운 빗속에서 내 눈물만 뜨겁게 얼굴을 적셨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도 종종 생일이면 굵은 비가 내렸다. 장맛비에는 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런 생일에는 무척 우울했다. 생일이라고 배달 음식 시켜먹기조차 애매할만큼의 비가 오는 날에는 혼자서 축하하기도 뭐한 생일이라는 생각에 몇 번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종종 축하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는 종종 어머니가 축하해주려고는 했지만, 어머니가 나보다 폭력적인 남편과 끝없는 가난에 고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늘 괜찮다며 넘기곤 했다. 항상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겨우 중고등학생이었던 내가 괜찮았을리가. 비 때문에 어두워진 방에 앉아서 그냥 다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 지나가긴 다 지나갔다.

이제는 부모님과도 소원해지고 회사를 다니면서 새로운 인간관계도 맺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다. 종종 나의 생일에도 맑은 날이 찾아왔고 그럴 때면 하늘이 나를 축하해주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자 웃곤 했다. 살다보니 비오는 날에도 좋은 추억이 많이 생겼다. 내가 비맞지 않게 안아주며 달리던 대학교 때 남자친구, 우산이 없던 나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주던 직장 동료 등 비가 오기에 쌓을 수 있었던 추억들이 내게도 생겼다. 이제는 비가 쏟아부어도 슬쩍 웃으며 지나칠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그다지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서러웠던 기억을 덮을 만한 일도 생기기도 하고 나약했던 날들도 지나가며 이제는 슬픔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다. 생일은 돌아오고 언제나 그랬듯이 비도 거세게 내리지만, 지금의 나는 훨씬 덤덤하게 생일을 맞이할 수 있다. 꿉꿉한 날씨에는 에어컨을 살짝 틀고 휴가를 내고 집 안에 누워서 밖을 바라본다. 나 말고도 누군가는 비를 맞으며 생일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내가 그랬듯이 슬픈 생일을 보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만히 그런 사람들을 위해 바란다. 내가 그랬듯이 그들에게도 불운했던 순간들이 다 지나가기를. 비가 오는 날에도 좋은 추억이 생기기를. 인생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좋은 추억으로 쌓이기를. 그렇게 생일을 맞이하고 나이를 먹어가기를.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이 좋은 기억으로 뒤덮이는 일이 되기를. 나는 그렇게 바라며 비를 바라본다. 


올해도 장마가 지나간다.

슬펐던 일들도 서러웠던 일들도 비에 휩쓸려가고 맑은 날이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다 지나갈 것이다.


Photo by Jessica Knowld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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