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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Nov 16. 2022

이스탄불, 화려한 세밀화 속으로

<내 이름은 빨강>을 추천하며

16세기 말의 터키(지금의 튀르키예)는 낯선 시대, 낯선 곳이다.

아마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그 시대의 이스탄불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튀르키예에 대해 깊이 배운 적도 없을뿐더러, 문학이나 사회에서 흔하게 다뤄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낯선 나라를 모험하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16세기 말의 튀르키예를 배경으로 하는 <내 이름은 빨강>을 권하고 싶다. 노벨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의 섬세하고 매력적인 문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는 듯 생생한 여행을 떠난 기분을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도시 이스탄불은 굉장히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 16세기 말의 이스탄불에는 술탄이 거주하는 화려한 궁전과 섬세하게 발달한 예술이 도시를 빛내주고 있었다. 그 화려한 도시 속에서 <내 이름은 빨강>은 세밀화가의 삶과 갈등, 사랑과 음모 등을 다룬다. 세밀화가들은 책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인데, 전통을 지키며 세밀화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그들에게 어느 날 충격적인 기법이 전해진다. 바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원근법'이 그것이다. 동서양 문화의 충돌을 겪은 세밀화가들은 갈등에 빠져버린다.


우물 속에 버려진 시체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이 소설은 추리소설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체를 살해한 범인을 찾으며 스토리가 진행된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저자인 오르한 파묵은 이스탄불의 모습을 섬세하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2권에 걸친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쉽게 현실로 돌아오기 힘들 정도로 이스탄불을 구석구석 돌아본 듯한 기분이 드는 그런 소설이다.







서평을 찾아보면 조금 어렵다는 말이 있다. 소설 초반은 아무래도 튀르키예식 이름과 존칭이 낯설어서 주석을 보면서 읽게 된다. 아무래도 잘 알지 못하는 문화를 접하다 보니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문체도 조금 어려울 수 있긴 하지만, 익숙해지면 술술 읽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보르헤스에 비하면 쉬운 문체라고 생각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가벼운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내 이름은 빨강>을 제대로 즐기려면 여유와 집중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사실 처음에는 출퇴근 길에 읽을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소설의 호흡이 길어서 출퇴근 길에 읽기가 힘들었다. 출퇴근을 하며 읽다 말다 하면 아무래도 툭툭 끊기는 느낌이 들고 전체적인 그림을 머릿속에서 그리기가 힘들어서 포기했다. 나중에 집에서 긴 시간을 낼 수 있을 때, 몰아치듯이 읽었는데 그때서야 이 소설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이야기는 다양한 사람, 사물들의 목소리가 직접 등장하며 진행된다. 등장인물의 목소리와 속마음을 직접 들을 수 있어서 등장인물과의 거리가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그 인물의 시선에서 마치 직접 주변을 둘러보는 듯한 묘사는 몰입감을 더해준다. 마치 벽에 손을 대고 벽을 훑는 듯이 자세하게 장면이 그려지며 이스탄불에 숨어서 모든 걸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2권에 진입하면 스토리 진행도 빨라져서 속도감이 붙는다. 엄청난 서스펜스가 있는 건 아니지만, 추리소설의 형식인 만큼 '범인이 누굴까'하는 궁금증이 커진다. 스토리 자체에 대한 궁금증도 커져서 각 잡고 소설을 읽게 된다. 주말에 일부러 시간을 비워놓고 음료 한 잔 준비해서 읽었을 정도로 소설에 푹 빠져서 읽었다.






살인이나 사랑을 다룬 스토리도 무척 재미있고 흥미롭지만, 이 책의 백미는 역시 동서양의 문화가 충돌하면서 겪는 세밀화가들의 혼란이다. 그들이 받은 문화적 충격과 갈등에 빨려 들어가면서 큰 지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서양의 "원근법"이 주는 충격 속에서 세밀화가들이 지켜온 전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하는 장면들은 모두 의미가 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을 덮었을 때, 굉장한 작품을 읽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물론 마냥 공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 인물인 셰큐레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면모가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적지 않겠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막연하게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이니 당연히 훌륭하겠지'하고 생각했다면, 직접 그 면모를 보고 자세히 느껴보길 바란다. 이야기의 규모와 세밀함, 깊은 의미에 분명 놀랄 것이다. 내가 장편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이 아니라 편협한 평가일 수 있으나, 나는 장편 소설의 매력을 새로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굉장했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제목 또한 숨겨진 의미가 있다. 읽고 나면 아주 아름다운 빨강이 머릿속을 스칠 것이다. 이 빨강만큼이나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 몇 백 년 전의 이스탄불을 걷는 느낌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해본다. 낯선 문화를 여행하며 느끼는 긴장감과 모험심, 그리고 넓은 스케일의 지적 영감이 몰아칠 것이다. 2권으로 된 긴 소설이니만큼 한가한 주말이나 연휴에 푹 쉬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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