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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바닥 시체부터 우주의 마지막까지

다른 삶을 더 많이 체험하고 이해할 때, 사회는 더 나아지지 않을까

by 삼김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민음사


시체가 말을 하는 기괴한 느낌.

단 몇 마디 문장만으로도 우리는 시체가 되어버린 듯 합니다. 신기한 일이죠. 텍스트만으로도 섬짓한 상상을 펼칠 수 있다니, 새삼 인간의 상상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을 자주 읽는 분이라면 조금 더 공감하실 겁니다. 그저 글자의 나열일 뿐인 책이 내 머릿속에서는 거대한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요. 등장인물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기분, 내가 위험에 처한 것처럼 두근거리는 스릴, 눈 앞에 생생한 풍경들. 픽션은 우리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데려다 주고,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줍니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드라마, 영화 등의 영상매체를 통해 늘 픽션을 접하며 살아가는데요. 왜 우리는 허구의 세계를 원하는 걸까요? 왜 우리는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는 걸까요? 픽션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길래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갈망하는 걸까요?


오늘의 삼각김밥 에피파니는 픽션의 힘과 영향력을 살펴보고, 상상으로 가득한 세계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픽션은 위험하다

1980년 12월 8일.

비틀즈의 멤버인 존 레논은 총탄에 맞고 숨을 거뒀습니다. 그를 저격한 마크 채프먼은 공원 벤치에 앉아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경찰을 기다렸다고 하죠. 《알쓸별잡》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이야기하며 잘 알려진 사건이기도 합니다. 영문 위키에 의하면 채프먼은 자신을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와 자신을 동일시했고, 그날 들고 있던 책에 “This is my statement(이것이 나의 진술이다)”라고 적어놓기까지 했다는군요. 심지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존 힝클리 주니어의 호텔방에서도 <호밀밭의 파수꾼>이 발견되었다는데요. 이쯤 되면 섬뜩해집니다.


물론 이들은 이 소설을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며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195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워낙 잘 알려진 책이다보니 읽은 사람들 중에 범죄자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고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들에게 어떤 감흥을 불러 일으켰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소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은 젊은이들이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하는 일이 속출했다는 것에서 붙은 이름인데요. 지금은 유명인들이 자살하면 일시적으로 자살률이 올라가는 것을 일컫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정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설에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긴 한 모양입니다.


부정적인 영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은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으로 남북전쟁을 촉발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부 전선 이상 없다> - 영화로도 나왔습니다만 원작은 소설입니다 -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낸 이 책은 강력한 반전(反戰) 메시지를 건넵니다. 이 책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1933년에 나치는 이 책이 독일 군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패배주의를 조장한다며 그들의 사상에 위배되는 다른 책들과 함께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에 앞선 1930년, 이 소설이 영화로 나오자, 나치 돌격대는 상영 중단을 요구하며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바람에 영화가 상영 중지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jpeg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픽션은 이처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줍니다. 왜 픽션은 우리에게 이토록 강렬한 영향을 미치는 걸까요? 픽션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는 걸까요?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할 수 있을까

<이야기의 탄생>이라는 책은 서사와 뇌 과학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이 책에 한 사례가 소개되어 있는데요. 리지라는 이름의 후두엽 뇌졸중 환자는 시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신경학자인 파인버그 박사가 리지에게 시력에 문제가 있냐고 묻자, 리지는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그녀에게 무엇이 보이냐고 물으니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가족이랑 친구들을 보니까 좋네요. 마음이 놓여요.”


뒤이어 파인버그 박사는 그녀에게 자신을 보라고 말하며 질문합니다. 파인버그 박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대해 말해보라고요.


“편안한 복장이네요. 재킷이랑 바지요. 주로 남색이랑 고동색이군요.”


그런데 파인버그 박사는 흰색 병원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책에 의하면, 리지는 빙긋 웃으며 걱정거리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갑작스럽게 시력을 상실한 뇌는 그 사실을 곧바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뇌는 세계에 대한 환각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후두엽 뇌졸중 환자에게는 흔한 일이라고 하네요.


우리 뇌는 머리 밖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감각 기관에서 전해준 신호를 뇌에서 처리한 결과일 뿐입니다. 실제로 아무 자극이 없더라도 뇌가 ‘아프다’고 느끼면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꿈을 꾸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않지만, 꿈 속에서는 무언가를 봅니다. 냄새를 맡고 촉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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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 픽션을 볼 때도 마치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글자든 영상이든 정보를 접한 뇌는 그것을 신경계 모형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책에 적힌 “경첩”이라는 단어를 보면, 뇌는 “경첩”이라는 이미지를 생성합니다. 독자는 현실에는 없는 “경첩”을 보게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우리는 픽션 속의 내용을 경험합니다. 현실이 아닌 상상 속에서 우리는 주인공을 자신과 일체화하며 서사를 따라갑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위기를 체험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납니다. 긴박감이 넘치는 서사, 어떻게 될지 자꾸만 궁금해지는 서사를 접하면 뇌에서는 초콜릿, 더 심하게는 마약을 갈망하는 현상과 유사한 반응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뇌가 만들어낸 세상 속에서 즐거운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는 만족스럽게 책을 내려놓거나 영화관을 나서게 되죠. 픽션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강렬한 체험을 하게 만듭니다.




우물 바닥의 시체부터 우주의 마지막까지

이제 처음에 인용했던 문장으로 되돌아 가보겠습니다. 우리는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다.”라는 문장을 읽고, 우물과 그곳에 놓인 시체를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뒤이어 “이미 돌에 맞아 깨져 있던 내 머리는 우물 바닥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얼굴과 이마, 볼도 뭉개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뼈들도 부서졌고 압안엔 피가 가득하다.”(같은 책 13p.) 라는 대목에 이르면 한층 더 소름이 돋습니다. 마치 눈 앞에서 그걸 보기라도 한 듯 몸서리 칠 수도 있죠.


오늘날 우리는 우물 바닥의 시체 이야기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온 이야기, 출판된 소설, 그리고 영화와 드라마까지 온갖 이야기들이 넘쳐 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현실이 아닌 무궁무진한 세상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이스탄불의 어느 우물 바닥부터 류츠신의 <삼체> 속 마지막 풍경, 즉 우주의 마지막까지 우리는 수많은 세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뇌가 만들어낸 무수한 상상 속에서 차별, 폭력, 자비, 사랑을 겪고 나면 우리는 이야기를 접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픽션 속에서 변화를 겪은 우리는 전쟁을 반대할 수도, 사회의 부조리에 목소리를 낼 수도 있게 됩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노예제 철폐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픽션이 이렇게 강력하게 동작하기 때문입니다.


픽션의 영향력에 대해 조금 더 말해보자면, 현실을 벗어나 해방감을 주거나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것 외에도 다른 순기능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공감 능력을 활성화 하는 건데요.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문학 소설을 읽는 것은 대중 소설이나 논픽션을 읽는 것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능력을 더욱 강화해 준다고 합니다. 공감 능력은 우리가 회사나 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도 무척 필요한 능력입니다. 더 좋은 가족, 연인, 친구가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고요.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전쟁, 난민,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도 더 세심하게 바꿔줍니다. 이처럼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 능력이 좋아질 때,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되겠죠.


다른 순기능을 말해 보자면, 우리가 아직 겪어 보지 못한 미래를 미리 체험하고 답을 찾게 해준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SF에서만 다루었던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에는 부쩍 많아졌습니다. 아무래도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에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일 텐데요. 이처럼 픽션은 미래를 미리 보여주고, 사고 실험을 촉발하여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를 미리 경험하게 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를 대비하고, 더 나은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에 관한 소설, 이언 매큐언의 <나 같은 기계들>의 한 장면을 보여드리면서 오늘의 에피파니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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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아담’이라는 인공지능 로봇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입한 인공지능 로봇으로 인해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맙니다.


"잘 들어, 그가 인간처럼 보이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나로서는 그를 인간으로 여길 수밖에 없어. 상대가 당신이라도 마찬가지지. 그 누구라도. 우리 모두가 그래. 당신은 그와 잤어. 난 화가 나. 그것에 놀라는 당신이 난 더 놀라워. 만일 진짜로 놀란 거라면."


그의 연인이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로봇과 바람이 난 겁니다. 연인은 그 로봇이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기 때문에 바람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주인공은 몹시 화가 납니다. 그는 대체 왜 분노를 느끼는 걸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연인이 바람을 폈다고 느끼게 했을까요? 과연 이 상황에서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성을 갖췄다고 볼 수 있을까요?


고민해보시다가 더 자세한 상황이 궁금하시면 <나 같은 기계들>을 읽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이니 분명 푹 빠져서 읽게 되실 겁니다.




다음 주 예고


특정 순간에 '자연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힘'과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위치와 속도'를 알고 있는 지성체가 존재한다면, 그는 가장 작은 원자에서 거대한 천체에 이르는 우주 만물의 움직임을 하나의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에게 불확실함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과거와 미래가 그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 <카오스, 카오스 에브리웨어> 41p., 팀 파머, 디플롯


위의 말을 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라플라스라고 합니다. 대학에서 미분방정식을 수강하셨다면, 한번쯤 들어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위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유명해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성체에게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18세기에는 라플라스와 같이 물체의 위치와 속도만 알고 있으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아직 뉴턴의 고전역학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이와 같은 시각을 결정론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고전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날씨입니다. 아주 작은 변화 - 흔히 나비효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 만으로도 날씨는 예측하기 아주 어려워집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금융 시장,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의 유행 등은 정말 라플라스의 악마가 단순한 공식으로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예고가 길어졌는데요.

다음 주는 결정론과 혼돈을 살펴보며 새로운 에피파니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에피파니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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