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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도 우주도 결정되지 않았다

결정론을 넘어 혼돈으로

by 삼김
As flies to wanton boys are we to the gods; they kill us for their sport.
장난꾸러기 소년에게 파리가 그러하듯이 신 역시 우리를 재미 삼아 죽인다.
- <리어 왕>, 셰익스피어


오늘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의 줄거리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부족한 것 없는 절대적인 왕 리어는 나이가 들어 은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세 딸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물어봅니다. 아첨하는 두 딸과 달리 막내딸 코델리아만이 진실된 답을 합니다. 그러나 리어는 아첨하는 딸들에게 권력을 넘기고, 코델리아를 내쫓아 버립니다. 두 딸은 권력을 넘겨받자 아버지인 리어를 내칩니다. 모든 지위를 잃은 리어는 광기에 휩싸이고 자신을 구하러 온 딸 코델리아마저 죽어버리자 결국 슬픔과 광기를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리어 왕>의 줄거리뿐만 아니라 인용된 문장을 봐도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운명을 아주 깊이 있고 통렬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리어 왕처럼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고 착각하지만, 그 결정은 잘못되기도 합니다. 운명은 그런 인간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가곤 합니다. 오늘의 에피파니는 우리의 삶이 이미 운명처럼 결정되어 있는가, 우리가 사는 우주도 결정되어 있는가, 더 나아가 우리의 자유의지는 무엇인가를 가볍게 다뤄보려 합니다.




라플라스의 악마를 바라다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 의지는 의미를 잃고 맙니다.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니까요. 그런데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도 창작하는 일도 이미 예정된 것이고, 시험에서 1등을 하는 사람도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자유롭다고 볼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우주에서는 이미 모든 선택이 내가 아닌 우주에 의해 아주 오래전부터 결정된 것이니까요.


우주를 이렇게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론적’ 방식이라고 합니다. 18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전까지는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를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왜 18세기 이후인지 궁금하실 텐데요. 그 배경에는 18세기의 아주 걸출한 과학자, 뉴턴이 있습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비롯해 우주의 질서를 수학적으로 풀어냈죠. 그것에 영향을 받은 많은 과학자들은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뉴턴의 운동 방정식에 매료된 그들은 믿었습니다. 언젠가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완전한 방정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방정식에 적당한 숫자(초기값이라고 합니다)만 넣을 수 있다면,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요.


그 믿음을 대표하는 예시가 바로 ‘라플라스의 악마’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라플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특정 순간에 '자연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힘'과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위치와 속도'를 알고 있는 지성체가 존재한다면, 그는 가장 작은 원자에서 거대한 천체에 이르는 우주 만물의 움직임을 하나의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에게 불확실함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과거와 미래가 그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 <카오스, 카오스 에브리웨어> 41p., 팀 파머, 디플롯


사람들은 라플라스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성체를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불렀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믿음에 따라 우주를 지배하는 방정식을 찾고자 했습니다. 마치 라플라스의 악마가 그들의 이상적인 모습처럼 보일 정도로요. 어쩌면 이들은 악마보다는 사도(使徒)에 가까웠는지도 모릅니다. 완전한 방정식을 찾아낸 사람이 아직 없기도 하거니와, 오히려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같았으니까요.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주의 방정식은 아주 아름다울 것이며, 우주가 이렇게 만들어진 데는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는 게 그 믿음이었습니다.




아니,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낙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두 딸에게서 배신당한 리어 왕처럼 과학자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0세기 들어서 등장한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 그리고 수학자 괴델이 증명한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s)가 그것입니다.


1925_kurt_gödel.png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한 괴델. 출처 - 위키커먼스


불확정성 원리는 말합니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하는 방법은 없다고. 언뜻 이해가 가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입자 A가 기준점으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자 A의 속도는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입자 B가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입자 B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입자 A도 B도 위치와 동시에 운동량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왜 과학자들에게 충격을 불러일으켰을까요? 뉴턴 이래로 물리학자들은 믿었습니다. ‘완전한 방정식’만 있으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위치를 알면 운동량을 알 수 없고, 운동량을 알면 위치를 알 수 없다니. 이것은 우주가 ‘너희들은 모든 걸 알 수 없다’고 선언한 것처럼 들렸을 겁니다.


여기에 불완전성 정리는 더 끔찍한 진실을 털어놓습니다. 괴델은 ‘모순이 없는 어떤 수학 체계에서,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모든 진리를 다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그 체계는 자기 자신이 모순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체계에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가장 논리적이어야 할 수학 체계마저 불완전하다니, 그야말로 대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희망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움을 갈망하다

아인슈타인 조차도 충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양자역학을 반박하려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도 우주는 언젠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며, 품위 있는 법칙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신성한 과학을 숭배했던 다른 과학자들처럼 그 역시도 우주에는 의미가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불확정성 원리와 확률로 우주를 설명하려 하자, 그는 당혹스러움과 거부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오늘날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개념이 되었습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여러 연구 결과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가 수학적으로 아름다울 거라는 인간의 갈망은 끝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최근까지도 모든 이론을 수학적으로 아름답게 설명하려 했던 초끈 이론이 물리학의 주류 담론이었습니다. 지금은 초끈 이론이 많은 비판을 받고 주류 담론에서도 물러나고 있지만, 어쩌면 이 이론과 결정론적 세계관은 우주가 아름다울 것이라고 믿는 인간의 바람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결정론적 세계관이 막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자유의지가 생겨났을까요? 우주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선택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아쉽게도 이 질문에는 아직 ‘모른다’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래에서 혼돈, 즉 카오스 이론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 혼돈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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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이론과 프랙털에 대해서는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에서 친절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책이기도 하고 베스트셀러이기도 했으니 아마 이 개념에 익숙하신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카오스란 초기 조건의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계(system)를 말합니다. 대표적인 현상이 나비 효과입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대기에 미세한 변화가 토네이도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비 효과에 대해 잘 말해줍니다. 기상학자인 로렌즈가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요. 정확히 동일한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날씨는 대표적인 혼돈계(chaotic system)인데요. 날씨의 초기 조건은 각 지역의 온도, 기압, 풍속, 습도 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지역, 그러니까 1 cm² 범위까지 세세한 초기 조건을 알지 못합니다. 이 데이터를 다 수집할 수도 없을뿐더러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초기 조건에 따라 엄청나게 변하는 혼돈계를 예측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가지 이론과 슈퍼 컴퓨터의 발전 덕분에 우리는 지금의 일기 예보를 사용할 수 있는 건데요. 아시겠지만 이 날씨가 늘 맞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장기 예보의 경우에는 틀릴 확률도 높아집니다. 혼돈계에서 무언가를 예측하는 건 분명히 한계가 존재하는 거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분히 혼란합니다. 날씨뿐만 아니라 경제 예측, 팬데믹에서의 피해 규모 예상, 전쟁 가능성 예측에서도 카오스 이론이 활약하는 걸 보면 분명 세상은 혼란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양자역학이나 수학처럼 우주의 근본 원리와는 따로 떨어져 보입니다. 인간이 인식하는 혼돈계는 분명 거시적이라서 양자역학과는 더더욱 관련이 없어 보이죠.


그런데 <카오스, 카오스 에브리웨어>라는 팀 파머의 책은 우주의 근본 원리에도 카오스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팀 파머는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을 카오스 이론을 통해 차분히 설명합니다. 아직 그의 이론이 실험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았으나,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가 생겨나는 방식은 평행 우주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미리 결정된 흐름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그 흐름은 불확실하며 그 불확실성 속에서 선택이 현실을 규정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그동안 이해해 온 결정론이 틀리지도 맞지도 않게 비틀려 버립니다.


앞으로 팀 파머가 말한 우주론이 주류 담론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우리의 인식은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 의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운명 속에 살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결정한 우주에서 우리 나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걸까요.


만약 자유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범죄자를 처벌할 수도 없을 겁니다. 범죄 역시도 이미 빅뱅 때부터 예정된 일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범죄를 미리 예견할 수도 있을까요? 날씨도 예측하지 못하는데 범죄를 예측하는 것은 회의적입니다만, 범죄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처벌할 권리가 있는 걸까요.


오늘의 에피파니는 여러분들께 자유 의지에 관한 질문을 안겨드리며 마쳐보려 합니다.




다음 주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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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은 선택적입니다. 감각한 모든 것을 전부 기억하지 않고 필요한 것만 선별적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기억은 책이라는 형태로도 남고, 서버에 데이터라는 형태로도 남아있습니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책을 불태우는 등 기억을 폭력적으로 소거하기도 했는데요.

오늘날에는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중요한 데이터를 잊지 않기 위해 Arctic World Archive(AWA)라는 북극에 인류의 디지털 기억을 보관하는 데이터 저장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기억과 망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며 또 다른 에피파니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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