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기억, 미래 기억
자리에 앉게, 몬태그. 자 보게. 마른 꽃잎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네.
첫 장에 불을 붙이고, 그리고 두 번째 장에도. 종이쪽들이 하나씩 검은 나비로 변하고 있지? 어때, 아름답지 않나? (생략)
한 장 두 장, 제1부 제2부, 그렇게 허황한 의미들과 빗나간 약속들과 공허한 개념들과 쓸데없는 철학들이 불타 없어지고 있지 않나?
- <화씨 451> 레이 브래드버리, 황금가지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한두 달 정도 있다가 돌아오기로 한 약속이 무색하게도 반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혹시라도 기다려주신 분이 계신다면 무척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의 에피파니는 SF 소설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으로 시작해 보았습니다. <화씨 451>은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사회를 그리는 소설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책의 무용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허황한 의미”, “빗나간 약속”, “공허한 개념”, “쓸데없는 철학”이라는 말로 책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대사입니다. 작품 내에서는 이 말이 아주 이중적으로 들리는데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책을 태우는 인물이 오히려 책에 관해 더 잘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소각하는 일은 그 안에 담긴 사유, 감정, 역사 등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일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인간의 머릿속에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기억은 쉽게 지워버립니다. 충격적인 사고 현장이나 연예인 뉴스는 세세한 사건들이 모두 기억나는데, 오늘 외운 영어 단어 같은 건 몇 번을 반복해도 기억이 나지 않죠. 연예인 이름보다 짧은 단어라 해도 뇌는 어찌나 기억하기를 거부하는지 모릅니다.
사실 당연한 반응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기엔 인간의 뇌는 한계가 있고, 다른 지식보다도 생존에 필요한 기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요. 오히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기억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하더군요. 과잉 기억 증후군 환자들은 불쾌했던 기억, 슬펐던 기억, 아팠던 기억을 잊지 못해 괴로움을 겪는다고 하니까요. 제 생각이지만 어린 시절에 겪은 주사의 공포가 계속 남아있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불편할 만큼 주사가 꺼림칙할 것 같군요.
흔히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잊어 버려.”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기억해 보았자 감정 낭비이고, 신경 쓰이기만 할 테니까요. 망각은 이렇듯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 기제로 쓰입니다.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인생을 더 행복한 감정으로 채우기 위해서 망각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한 망각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우리는 잊고 싶은 기억이 있는 걸까요?
생각보다 인류의 역사는 폭력적인 망각을 반복해 왔습니다. 진시황은 법치주의를 꿈꿨고 유교를 무척 싫어해서 “분서갱유”를 저지릅니다. 한자를 풀어쓰자면, 책을 불태우고 유교를 연구하는 유생들을 생매장한 겁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의 모든 책을 불태웠습니다. 심지어 그게 아인슈타인의 저작물이라도 말이죠.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문화유산을 파괴하며 유구한 역사를 스스로 지워버리기도 했죠.
이처럼 특정 지식을 틀어막고 망각을 강요하는 일은 역사 속에 널려 있습니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부정했던 교황청,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많은 사람을 배척한 미국의 매카시즘,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금서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 사회는 특정 지식을 지우려고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인간의 뇌는 자아에 심각한 위협을 받으면, 잘못된 합리화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옳고, 저 사람이 틀린 거야.” 하는 방어 기제 말이죠. 어쩌면 인간 사회도 그런 방어 기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존의 체제를 위협하거나, 권력자의 생각을 뒤집어엎는 사상이 등장하면 마치 뇌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잘못된 합리화”가 일어납니다. 관련된 기억은 모두 소거되고, 특정 사상을 위주로 사실이 재해석되며, 그 외의 것은 불건전한 것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많은 사람이 이 “합리화” 작업을 당연히 받아들인 걸 보면, 인류는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 싶은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다른 사람이나 사상을 폭력적으로 내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미래 기억'이라니.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식사하시고 삼십 분 후에 약을 드세요" 같은 말을 기억하는 게 바로 미래 기억이란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 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복복서가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은 많이 알려져 있듯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입니다. 시종일관 주인공의 담담한 필체와 섬뜩한 시선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이 낯설면서도 충격적인 결말로 독자를 이끌어가는 작품입니다.
소설에서도 드러나듯이 알츠하이머 환자는 ‘미래 기억’을 망각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잊어버리는 게 미래 기억입니다. 미래 기억을 못 하면 영원히 현재에 머무르게 된다니.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사실입니다. 보통 망각이라고 하면 과거 기억만을 잊는 걸 떠올리는데, 미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미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지만, 위에서 말했듯 사회적으로도 미래 기억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모양입니다. 평화로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압니다. 원하는 직업을 갖고, 직업을 가진 후에 어느 정도 수입이 생길지, 어떻게 먹고 살지가 분명합니다. 찬란한 미래를 확고히 믿으며 앞으로 더더욱 문명이 발전할 거라 생각합니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1871~1914) 시대가 대표적인 예시인데요.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물론 유럽에 한정된 시대 개념이지만요. 자동차, 전신기, 비행기 등이 발명되고 사람들(사실 부유층)은 문명이 점차 발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전에 없던 번영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그것이 무시무시한 현대전이 될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이전에 이야기했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 나오듯이 청년들은 가슴에 꽃을 꽂고 전쟁터로 진군합니다. 그것도 노래를 부르며 미소까지 지으면서요. 이들은 분명한 미래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을 끝내고 영광을 한 아름 안은 채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요.
하지만 제1, 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유럽은 큰 충격과 공황에 빠집니다. 그들은 폐허 위에 서서 무엇을 세워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쟁의 상흔만 남긴 기존의 학문과 예술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미래 기억이 사라진 것처럼 그들은 사회적 혼란에 빠졌고, 새로운 과학과 예술 사조들을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아래는 막스 에른스트가 남긴 <비 온 후의 유럽 II>라는 작품입니다.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을 통해 전쟁 이후의 유럽을 묘사했는데, 당시 유럽인들의 무너진 시대에 대한 허망함과 처참한 심정이 잘 느껴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끝났습니다. 아직도 세계 대전이 끝난 지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심지어 한국은 1950~1953년까지 6.25 전쟁을 겪었으니 더더욱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후의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이 등장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제 전쟁을 잊고 다시 한번 새로운 미래 기억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하지만 개인의 삶은 여전히 미래 기억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기술이 터무니없이 발전하던 벨 에포크 시대와 비슷하지만, 그 시대처럼 모든 것을 마냥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보이던 찬란한 미래가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더 큰 변화와 지구 열탕화 시대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보고 있을까요? 우리의 미래 기억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요?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 시대 이후로 우리는 더 많은 위기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 없을 것만 같던 현재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사람들은 조금씩 더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어떤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미래를 결정하게 될까요?
과거의 인류는 너무나 많은 기억을 소각하려 했지만, 어떻게든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들은 일제강점기에도 우리 말을 잊지 않고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두에 이야기했던 <화씨 451>의 결말에도 책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듯이 말입니다. 책을 모두 태워버리는 소설 속 세상에도 지식은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모두 한 권의 책을 외우고 기억하며 사유, 감정, 역사를 간직합니다. 사람 한 명이 한 권의 책이 되는 소설의 결말은 뭉클하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현재에도 기억을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극 데이터 보존소(Arctic World Archive)에는 인류의 다양한 역사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데이터를 특수 필름에 기록하여 영구 동토층 깊숙한 곳에 보관하는데요. 혹시 모를 전 지구적 재난, 핵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일에도 인류의 유산이 잊히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달되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커다란 재난이 일어나도 기억을 이어가는 것은 인간에게 큰 의미가 되기도 하고, 미래 세대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인류는 이렇게 기억을 이어가고 또 무너지고도 다시 일어섭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품고, 미래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그래야만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현재의 내 모습이 즐겁거나 힘들거나 혹은 슬프더라도 그것은 모두 의미 있는 기억이 될 겁니다. 그 기억으로 인해 우리는 사고하고 미래에 무엇을 할지 결정하겠지요. 그 결정이 또다시 미래 기억을 만들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 자신은 미래로 나아갈 것입니다. 어떤 위기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지난날 그랬듯이 소중한 기억을 지키며 우리만의 미래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오늘도 당신의 하루가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길 바라며 이번 주 에피파니를 마칩니다.
어떤 사물이든 현상이든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앉아 누군가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떠올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치형의 건축 형태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이 겹치고 합쳐지면 또 다른 에피파니를 발견할 수도 있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공계 전공을 했다가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니 새삼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알쓸신잡>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던 것이 이런 점이었던 것도 같고요.
다음 주에는 이렇게 사물과 현상을 입체적으로 보는 방법을 다뤄보며 새로운 에피파니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