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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일이 두렵다면

쓸모없음이야말로 인간성을 말해준다

by 삼김
팩맨.JPG


오늘은 박물관에 갔던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요?

2017년에 미국에 있는 컴퓨터 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역사적이라면 역사적인 게임 팩맨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어서 재미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드보락 키보드나 오늘날 마우스의 프로토타입이 신기하기도 했고요. 나무로 만들어진 키보드나 마우스가 예스럽게 느껴져서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드보락 키보드.JPG
마우스 프로토타입.JPG


캘리포니아에 간 김에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도 갔었습니다. 굉장한 전시물이 많았죠.

공룡 화석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광물, 푸코의 진자 등이 전시되어 있는 커다란 박물관이었습니다.


캘리포티아 과학 아카데미.JPG


다 큰 어른인 저도 재미있었지만, 어린이들에게 더 유익한 박물관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실제로 어린이 관람객도 많았고요. 상상력이나 호기심을 기르기 위해서 이만한 경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도 많은 영감을 받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더욱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졌지요.




상상과 예술은 모두 쓸모없는 것

오늘날 어린이들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배우기도 합니다. 정서적으로 좋기도 하고 창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니까요. 하지만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19세기만 해도 어린이들은 이런 교육을 받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 <올리버 트위스트>로 유명한 찰스 디킨스의 또 다른 소설 <어려운 시절>의 초반에는 어린이들이 교사에게 교육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학생들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20번 학생’처럼 번호로만 불립니다. 어린이들이 배우는 것은 오로지 사실(Facts) 뿐입니다. ‘말’을 묘사해 보라는 선생의 지시에 학생은 “네발짐승. 초식동물. 이빨은 마흔 개로 어금니 스물네 개, 송곳니 네 개 그리고 앞니 열두 개……(생략)”라고 대답합니다. 심지어 상상하는 학생에게는 “사실, 사실, 사실만을!”이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절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면서요.


디킨스는 당시의 교육을 날카롭게 풍자했습니다. 시, 소설과 같은 상상력은 배제되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던 시대를 비판한 것입니다. 디킨스의 시대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더 많은 생산을 하는 것 말고는 모두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아이들은 기계 부품처럼 사실만을 주입받았습니다. 그나마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가혹한 아동 노동으로 착취당했으니까요. 실제로 공장이나 굴뚝 청소부로 일하면서 갖은 병에 시달리거나 사고를 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마음껏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굳이 산업 시대까지 멀리 가지 않아도 최근까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간혹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께서도 자신은 어린 시절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배운 적이 없다는 말씀을 간간히 하시곤 하죠.


이처럼 노동이 우선시 되고 인간을 효율성으로만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손쉽게 상상력과 개성, 예술을 말살해 버리곤 합니다. 항상 더 많은 생산성을 위해 “쓸모 있는 것”을 강조하기만 할 뿐이죠.



Chaplin_-_Modern_Times.jpg <모던 타임스(Modern Times, 1936)> 에서 산업 사회 인간의 기계화를 풍자한 찰리 채플린, 출처: 위키 커먼즈




19세기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디킨스로부터 200년 정도 지난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산업화에서 멀어져 있을까요?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이 바뀐 걸 보면 확실히 그 시대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이 박물관을 견학하고 그림을 그리고 상상을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른들은 어떨까요? 우리는 그 시대보다 더 나아진 삶을 살고 있을까요? 다르게 질문해 보자면, 우리는 충분히 상상하며 자신의 개성을 발산하고 있나요? 예술을 향유하거나 책을 읽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물론 어른은 어린이와는 다릅니다.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보호받기보다는 보호해야 하는 쪽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늘 경제적으로 얽매여 있어야 한다면, 게다가 정서적 보호도 받지 못한다면 그건 산업 혁명 시대의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인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 계발을 하며 더 생산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삶은 산업 혁명 시대의 재림처럼 느껴집니다. 휴식조차 “쓸모” 있지 않으면 굳이 취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자본주의는 쓸모만을 정의합니다. 19세기 어린이에게 ‘사실’만이 쓸모 있다고 정의했듯이요. 오늘날의 우리는 ‘경제적 자유’, ‘월 천’이라는 말에 쉽게 노출됩니다. 경제적 자유가 없으면 예술이나 독서는 후순위로 밀리는 것이 당연하고, 한 달에 천만 원을 버는 삶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청소 일을 하고 작은 집에 살더라도 독서를 할 수 있는 삶에 만족하면 그만이고, 행복은 돈과 상관없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온갖 갑질에 쉽게 노출되는 노동은 기피하게 되고, 돈이 곧 행복이라는 말을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돈, 집, 지위만이 정답인 이곳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하는 나라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다가옵니다.


저 역시 자기 계발에 혈안이 되고, 회사에서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쓸모 있는 일”만을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휴식은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한 “쓸모 있는 일”로 정의하고, 늘 최소한으로만 쉬려고 했습니다. 사실 휴식을 하면서도 불안해서 업무에 관한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곤 했습니다. 어학 공부에 몰두하기도 했고요. 그 결과는 예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뿐이었습니다. 사실 나쁜 생각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지요.


그런 생각에서 깨어난 후에 든 의문이 있습니다. 왜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 예절이 존재할까요? 세상에서 가장 돈을 버는 것과 거리가 먼 것이 예절일 텐데 말입니다. 왜 우리는 무례한 사람을 비난할까요? 왜 우리는 같은 말을 해도 무례한 사람보다는 다정한 사람을 더 선호할까요? 철저히 “쓸모”와 “필요”의 관점에서 보면 불필요한 예절이나 다정함은 낭비일 텐데 말입니다.




쓸모없기에 인간적인 장소들

예절이나 다정함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예절과 다정함의 사회적 기능이라든지, 살아남기 위한 진화의 결과라든지 그런 이유로 “쓸모 있는 것”이라 정의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이유가 없어도, 굳이 쓸모가 없어도 그것 자체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명이 된다고요.


예를 들어 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에는 아무 이유도 붙지 않습니다. 음악이 정서적으로 좋다는 이유를 굳이 듣지 않아도, 음악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것이나 역사에 대해 몰라도 우리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저 인간이 음악을 좋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음악을 듣는 일이 아무 쓸모없다 해도 인간은 음악을 들을 겁니다. 우리는 그저 음악이 좋으니까요.


예절이나 다정함 역시 아무 필요가 없는 일이라 해도 우리는 그것을 좋아합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니까요. 인간은 존경이나 호감을 표시하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발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유지할 겁니다. 그런 것에 “쓸모 있다”는 이유가 굳이 필요할까요?


쓸모가 없기에 인간성을 대표하는 장소들도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박물관도 그런 장소입니다. 오늘날 자연사 박물관 같은 곳을 견학하는 건 인공지능에 대해 알아가는 것보다 더 쓸모 있는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시대에도 “직접 눈으로 전시를 보는 건 시간 낭비다”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박물관의 전시를 직접 보는 건 인간의 감각을 깨웁니다. 분명 시간은 더 오래 걸리고 빠르게 정보를 습득할 수도 없지만, 이 방식은 훨씬 더 감각적이고 인간적입니다.


박물관뿐만 아니라 미술관, 도서관은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곳입니다. 특히 도서관의 무용함에 대해 다룬 책이 있는데요. 바로 우치다 다쓰루의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라는 책입니다.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도서관이란 들어서면 경건한 마음이 드는 장소입니다. 세계는 미지로 가득한 곳이라는 사실에 압도당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 점에서 기독교의 예배당과 이슬람교의 모스크, 불교의 사원 혹은 신사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런 곳들에는 사람들이 때때로 와서 기도를 하고 떠나갑니다. 특별한 종교 행사가 없는 한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은 비어 있고요.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유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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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다쓰루는 도서관을 종교적인 곳으로 비유했습니다. 사람이 북적이기보다는 고요한 편이 책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기 좋다면서요. 저자는 민간 업체에 위탁된 도서관이 단순히 이용자 수나 대출 도서 권수로 평가받는 걸 비판합니다. 시장의 논리를 도서관에 끌어오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자에 의하면 도서관은 자본주의적으로 접근할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초월적인 공간이기 때문이죠.


종교나 초월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회지만, 우치다 다쓰루가 말하는 건 수긍이 갑니다. 무수히 많은 책이 뻗어 있는 조용한 공간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감정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 어딘가 설레고 경건해지는 마음이 드는 걸 보면 분명 그런 초월적인 장소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생산성이나 돈으로 계량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에 들어서는 감각은 분명 거짓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쓸모없다”라고 정의되는 모든 것은 이런 초월적인 것에 연결되는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쓸모”라는 것은 수치화하거나 정형화할 수 있는 것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말인데, 상상력이나 창의성, 예술과 같은 건 분명 개량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인간은 쓸모 있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돼라”는 말이 있지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말은 조금 폭력적이라 느껴집니다. 마치 “지금의 너는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외치는 것만 같으니까요. 자기 계발의 확언 같은 말이지만, 이 말만큼이나 인간을 자본주의의 부품으로 보는 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품이 되기 위해서,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가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존중하며 사유와 개성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무용한 것이 인간성을 회복해 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의 에피파니는 이 이야기를 인용하며 “쓸모없는 것”과 자본주의, 그리고 인간성에 관한 사유를 던지며 마무리하려 합니다.


출처는 명확하지 않지만, 1850년대 뉴욕이라는 도시를 개발하면서 나온 일화입니다. 토목업자들은 신도시 한복판에 건물을 짓고자 했지만, 도시계획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공원을 만들자고 주장하며 말했습니다. “지금 공원을 만들지 않으면 100년 후에는 이 넓이만큼의 정신병원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라고요. 실제로 그가 한 발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옴스테드 덕분에 뉴욕에는 커다란 공원, 센트럴 파크가 지어진 건 확실합니다. 만일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공원이 아니라 높은 건물들이 들어섰다면 지금 뉴욕은 어떤 도시가 되었을까요?




다음 주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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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너무나 손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특히 대화형 AI가 생기고 나서는 정보를 쉽게 정리할 수도 떠먹을 수도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지식과 정보는 어떻게 체계화할 수 있는지,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단지 인공지능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의 의미와 체계를 정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나은 지혜를 추구하는 방향은 아닐까요?


다음 에피파니는 AI 시대의 지식과 정보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에 새로운 에피파니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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