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제목을 쓰고 보니 나 뭐쓰고 있냐(...)라는 기분이 들긴 하는데 고등학교 때 부터 한 번 쯤은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부터 왜? 라는 의문이 들었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왜 세상은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져 있는가?"
'세상은' 이라는 말이 거창할 수도 있지만, 고등학교 때의 세상은 거기까지였다. 누군가가 교육과정을 만들어 낼 때 문과와 이과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몇 십 만 명이 따로 시험을 보게 만들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나보다. 고등학교 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에는 일단 수능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럴 것 같지만 그 때 문과와 이과를 가르는 단 하나의 기준은 "수학"이었다. 간혹 영어가 싫다며 이과로 넘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금방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과라고 영어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과가 되면 조금 더 쉬운 수학 시험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과가 되었을 때 친구들의 자부심은 굉장히 높았다. "난 수학을 잘 한다."는 쓸데없는 자부심이랄까. 대학와서 그 수학으로 학살(!) 당할 때의 느낌은 잘 모를 때라서 그랬다.
나는 이과였고 복수전공으로 공학사와 이학사 모두 가지고 졸업했으니 누가 뭐래도 이과생이다. 문과와 인연이 없으니 문과생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문과생이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수능 때 부터 문과의 경쟁률은 월등히 높았고, 취직할 때도 문과생은 전공이랑 관계 없는 회사에서 일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전공의 영향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문과생은 구직을 할 때 더 심한 경쟁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타 전공 친구들까지 전부 같은 직장에 몰리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 법대에 입학해서 문과의 최종 스펙인 법조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단 직장에 들어가보면 또 다른 세상이다. 전반적으로는 기술이 있는 이과 출신이 연봉이 높다. 하지만 하는 일은 천차만별이다. 기술 회사라면 물건을 팔기 위해 엔지니어 출신을 영업으로 쓰기도 하고 수학을 잘 하든 못 하든 회계를 시작해야 하는 문과생들도 있다. 조금 더 잘 나가는 회사에 취직하면 영어는 공통이다. 회화는 둘째치고 용어 자체가 영어인 경우가 많다. 영어로 된 문서도 쓰지는 못 할지언정 읽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세상 일이 그렇게 똑부러지게 문과와 이과로 나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에게는 고등학교 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내용이었달까.
세상은 무 자르듯이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문과나 이과를 나눌 수도 없다.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일을 하면서 문과가 풀 수 있는 문제와 이과가 풀 수 있는 문제를 동시에 만난다. 이과생은 문서를 만들 때 여러 번 혼나고 짧은 영어로는 기술 문서도 이해할 수 없어서 쩔쩔매기도 한다. 언제나 기본 템플릿에 프레젠테이션을 만들다가 디자이너나 문과생이 만든 프레젠테이션을 넋놓고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반면 문과생은 화려한 외국어 능력과 문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일을 진행하려면 기술자한테 물어봐야 할 때가 있다. 수학을 놓은지 오래되었다면 지표나 그래프를 만들거나 회계를 해야하는 경우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일은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단순히 교과과정을 나누기 위해서 편의상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 뿐인 것 같다.
어릴 때는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 어른들이 없었다.
문과와 이과를 선택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도움을 주지만 그 것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는 분들은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은 사실 어른들은 문과와 이과를 나눈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더 전문적인 내용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 둘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시험보기 위해서 쌓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를 풀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들은 어느 한 쪽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문제를 해결 할 수 도 없다.
조금 덧붙이자면, 지금처럼 학문이 세분화되기 이 전의 세상에는 철학하는 과학자들도 많았고 그들이 정치나 예술을 하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 굳이 내가 여기서 덧붙이지 않아도(귀찮은게 아니다)고대 그리스부터 근대까지 그런 사례는 차고 넘치지 않았던가. 전략가인 제갈공명이 병기를 만든다던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만든 페르마도 수학이 취미인(!) 법률가였다던가, 거중기를 만든 정약용도 목민심서 같은 정치 관련 책을 썼던 일 등등. 그들에게는 문과나 이과의 구분이 있을리가 없었고 그저 관심이 가거나 필요에 의해서 그런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학문이 세분화되었다고 사람의 두뇌가 갑자기 문과형이나 이과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야 직장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최근에 나온 말 중에는 '통합형 인재'나 '제너럴리스트' 같은 것들이 있다. 말이야 최근에 나왔지만 예전부터 존재하던 인재상이었다. 중요한 정책이나 법을 만들고, 회사에서 어디에 자원을 투자할 것인지 최종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지식이나 공학적 지식 등을 두루 아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이 기획을 하거나 보고를 할 때 다양한 방면의 문제점이나 가능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일들을 맡게 된다.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한 쪽만 잘하기도 힘든데 여러 가지를 한 번에 잘 할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양쪽에 다 능통한 사람을 찾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가. 아침 일찍이나 주말에도 영어 학원을 다니는 직장인들을 생각하면 정말 힘든 일이다. 다만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도 모르게 쓰게 된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도 발전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훌륭한 직장인(?)이 될 학생들에게도 '사실 문과라고 문과 공부만 하면서 사는 건 아니란다' 하고 이야기도 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소소한 장점이려나. 우리 스스로도 훌륭한 직장인(!)이 되려면, 또는 때려치고 치킨집 사장님이 되면 마케팅이라도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데카르트는 '각각의 학문은 사람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관심을 갖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지식을 깨우치는 지혜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라고 했다. 팍팍한 삶이지만, 그래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에 관심을 갖다보면 굳이 두 분야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문과생 또는 이과생의 삶도 조금은 이해하면서 존중해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서로 조롱하는 것보다야 '그래도 나 대신 미적분해가면서 기술하는 친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라던가, '내가 연구하는 동안에 이걸 나가서 팔아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어차피 한 세상 어느 길을 택하던지 월급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