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요즘은 연필로 무언가를 쓰고 있다. 일기도 쓰고 낙서도 하고 연필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보고 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 연필을 쓰는 장면이 많이 나왔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연필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오랜만에 연필을 꺼내어 잘 깎아서 써보니 사각사각하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는 중독된 듯이 연필을 쓰고 있다.
아주 어릴 적에는 글씨 연습을 연필로 시켰다. 샤프나 펜을 쓰지 말고 반드시 연필을 쓰라고 시켰다. 그때 이후로는 연필을 잡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웬만하면 샤프를 사용했고 어른이 된 이후에는 주로 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업도 개발자이니 글씨를 쓸 일 자체가 더더욱 없어졌다.
지금처럼 글을 쓸 때도 웬만하면 컴퓨터를 사용한다. 가끔 SNS를 할 때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니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쓸 일은 점점 없어지고 있다. 그래도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듯이 굳이 손으로 글씨 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도 일기는 손으로 직접 쓰는 편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기 전까지는 펜으로 글씨를 썼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에 나는 연필을 꺼내보았다. 집에 연필이 왜 있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노란색 스테이들러 연필이 있었다. 일기를 연필로 쓴 날 나는 그 감촉에 빠져들었다.
잘 깎은 연필을 사용하면 쾌감이 있다. 연필에 따라서는 부드럽게 종이를 미끄러지듯 써질 때도 있지만,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종이 위를 살살 긁는 듯한 소리를 내는 때도 있다. 나는 잘 깎은 연필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것을 좋아한다. 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촉이다. 쓰다 보면 끝이 뭉툭해져서 점점 종이 위에서 둔하게 움직인다. 그러다보면 획이 굵어지니 글씨도 점점 굵어질 뿐만 아니라 사각사각하는 소리 대신 종이 위를 색칠하는 느낌이 든다. 어느 정도 굵어지는 것을 참다가 점점 글씨를 쓸 때 힘이 더 들어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깎아버린다.
편리한 걸로 따지면 역시 깎을 필요가 없는 샤프가 좋기는 하다. 하지만 굳이 연필을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연필을 깎고 나면 연필이 줄어드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이다. 연필이 점점 짧아지면서 수명을 다해가는 모습은 안타깝지만 연필만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일부러 연필깎이를 사다 놓고 굳이 연필을 깎으며 글씨를 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는 연필을 능숙하게 칼로 깎는 장면이 나온다. 연필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미대 친구들도 직접 연필을 깎아서 사용하는 것 같은데, 나는 칼질이 능숙하지 않아서 연필을 잘 깎질 못한다. 끝이 뾰족해지기보다는 어딘가 불균형하고 이상해 보여서 연필깎이에 의지하고 있다. 막 깎고 나온 연필을 잡고 글씨를 쓰면 그때의 촉감은 말로 할 수 없이 행복하다. 그렇게 종이 위에 글씨를 쓰고 있자면 언제까지라도 쓸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된다. 실제로 심한 날은 일기를 17장이나 쓴 날도 있었다. 그날은 연필을 계속 깎아가면서 일기를 썼다. 그 정도로 요즘에는 연필로 쓰기에 푹 빠져있다.
연필도 찾아보니 종류가 다양하고 후기도 많이 있었다. 지금은 스테이들러 노란색 연필만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다 쓰고 나면 다양한 연필을 사용해보려고 한다. 연필을 만든 회사나 제품들마다 쓰는 느낌의 차이가 조금씩 있다고 한다. 어떤 느낌일지 체험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렇게 점점 연필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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