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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Aug 07. 2021

일기를 너무 많이 쓴다

일기가 보여준 내 모습

원래 일기를 매일 쓰지는 않았다.

시작은 교보문고에서 사은품으로 온 DIY 노트였다. 함께 동봉된 스티커를 붙여서 자신만의 노트를 꾸며보라는 사은품이었다. 노트의 두께나 크기가 마음에 들어서 나는 스티커를 붙여 꾸며보았다. 그러고 나니 썩 마음에 들었다. 이 마음에 드는 노트를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다가 그냥 내 생각을 아무렇게나 써보자고 생각했다. 일기처럼 매일 쓰자는 거창한 목표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가끔 한 두 장씩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적어놓았다. 그림도 그리고 스티커도 붙여가면서 정말 아무 목적 없이 노트를 가지고 놀았다. 그러던 노트가 어느 순간부터 글만으로 빽빽하게 채워지더니 이제는 매일 10장 이상씩을 쓰고 있다. 시간이 나면 나는 대로 노트를 열어서 글을 가득히 쓰고 만다. 아무 목적이 없던 노트가 일기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일기에 그렇게 많이 적은 걸까 궁금해서 내가 쓴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마치 남의 글을 읽듯이 글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려고 했다. 일기에 쓰는 내용은 그날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주로 그날 했던 생각이나 기분이 적혀있었다. 가끔은 '이러지 말았어야 했다'라고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하고, '앞으로는 이렇게 하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나는 끝없이 자신과의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긴 내용의 일기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도 심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끝없이 궁금해했다. 나는 이런 내 감정과 사고를 내면 깊은 곳에서 모두 털어내려 하고 있었다.


나는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하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코로나 때문에 사람을 못 만나게 되고부터는 더욱 무언가를 이야기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말들이 내면에 쌓여서 폭발한 것 같았다. 하루 동안 겪었던 초조했던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 답답했던 마음을 마구잡이로 쓰고 있었다. 일기를 통해서 만난 나는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나보다 훨씬 깊이 상처 받았고 훨씬 깊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떤 말을 반복해서 적을 때면 특히 잘 느껴졌다. 끊임없이 나에게 괜찮다고 중얼거리고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글을 보았을 때는 자기 연민이 들 정도였다. 일기를 쓸 때는 그저 생각나는 말을 옮겨 적었을 뿐이었지만, 쓰고 나서 읽어보는 일기에는 나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당부하고, 내가 무언가 변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이런 나의 내면을 만나볼 수 있었을까? 어떤 형태로든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나 주변에 관한 내용이 없는 일기는 내가 얼마나 내 내면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내 내면의 문제로 주변의 일에 관심을 적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고 있다. 물론 공황발작과 우울함도 견디기 힘들지만,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유발한 원인들이 더 힘들 때가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은 불안함, 지금의 나는 형편없다는 자기혐오 등이 나를 병으로 몰아넣었다. 내가 쓰는 길고 긴 일기가 보여주는 것은 이런 원인들의 총집합이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우연히 만난 노트를 통해 다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나의 내면과 끝없이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일기를 끝없이 쓰고 있으면 나는 어딘가 후련함을 느낀다. 내가 어떤 내용을 쓰고 있든 나는 모든 것을 털어낸 듯한 시원함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내 내면의 문제를 벗어나서 내 주변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평범한 일기처럼 그날 있었던 일을 적고, 무엇을 보았는지, 누구를 만났는지를 적고 싶다. 일기를 통해 만난 나의 내면이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나 스스로도 벗어나기 어려운 문제를 겪고 있지만, 언젠가는 하루 동안 있었던 즐거운 일을 적어놓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시 읽어도 재미있는 일기가 되었으면 한다.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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