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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Aug 14. 2021

사실 아날로그하게 살고 싶어

아날로그 속으로 도망치고 싶어


출근을 하면 가장 먼저 맥북을 켠다. 그리고 해피해킹 키보드를 도각도각 두드리며 코딩을 한다. 코로나 시대라 화상 회의를 한다. 구글 캘린더는 화상 회의랑도 연계해서 쓸 수 있어 무척 편리하다. 나를 찾는 메신저 앱은 늘 울리고 있다. 나는 세상과 연결되어 검색으로 자료를 찾는다. 내가 일한 결과물을 업로드하고, 문서들을 클라우드에 저장하여 어디서나 맥북만 있으면 파일을 볼 수 있도록 해놓는다. 집에는 아이패드가 있다. 동영상을 볼 때 가장 많이 사용한다. 애플 펜슬을 사용하면 굿노트라는 좋은 앱을 사용하여 필기도 할 수 있다. 각종 색깔의 펜을 사용할 수도 있고, 노트를 어디에 뒀는지 찾을 필요도 없다. 책도 다운받아 아이패드에서 읽을 수 있다. 맥북이나 아이패드에서 시선을 떼는 것은 불편하다. 일이 끊기지 않게 하려면 계속해서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키는 편이 낫다.


계속 이렇게 일해왔기 때문일까? 나는 이 편리한 기기들에게서 탈출하고 싶을 때가 있다. 고도로 효율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기기들을 벗어나고 싶다. 어떤 날은 컴퓨터를 쳐다도 보기 싫다. 세상과 연결되는 대신 격리되어 숨어버리고 싶다. 더 이상 알림을 받고 싶지 않고, 화면만 계속해서 쳐다봐야하는 삶은 그만두고 싶다. 기회가 있으면 나는 이런 기기들과 격리되어 생활한다. 알림도 검색도 없이 불편함을 자처한다. 아이패드 대신 종이로 만들어진 책을 읽고, 노트 앱 대신 실제 노트를 사용한다. 캘린더 앱 대신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애플 펜슬 대신 진짜 연필을 사용한다. 그것도 연필깎이를 돌려가면서.


사실은 디지털로 되어 있는 세상 대신 아날로그한 내 방에서 살고 싶다. 디지털 기기에 비하면 효율은 아주 나쁘지만 가능하다면 불편한 아날로그 물건들을 사용하고 싶다. 다운로드 받은 책보다는 실제 종이책을 넘기고 싶다.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고 종이를 만지는 촉감이 좋은 종이책 말이다. 그 두툼한 부피와 무게감을 느끼고 싶다. 모든 책을 얇은 몸매에 숨긴 아이패드 대신 책장에 책을 잔뜩 꽂아두고 싶다. 애플 펜슬 대신 연필을 사용하고 싶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나는 연필심의 소리를 듣고 싶다. 가끔은 연필깎이로 깎아가며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듣고 싶다. 노트 앱을 사용하기 보다는 실제 노트를 사용하면서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두고 싶다.


퇴근 후 여유를 가질 때나 휴일에 쉴 때는 디지털 기기들을 내려놓는다. 급한 알림은 어쩔 수 없이 받아야하니 완전히 격리되지는 못해도 평평한 화면에서 눈을 돌려 종이책을 읽고, 노트에 연필로 무언가를 끄적인다. 일에서 벗어난 내 삶은 사각사각하는 연필 소리와 팔랑팔랑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만 남는다. 조용한 방에 종이 스치는 소리만 남으면 비로소 쉬는 느낌이 난다. 내가 세상인지 세상이 나인지 헷갈리는 인터넷 대신,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온전히 나만 남는다. 내 방에는 아이패드에 다운 받은 책보다 더 많은 종이책이 있다. 책갈피 기능 대신 실제 책갈피가 있고 아이패드보다 색깔이 훨씬 적은 펜과 형광펜이 있다. 문구점에서 산 각종 포스트잇이 있고 연필과 연필깎이가 있다.


내 안에는 디지털 기기를 잘 쓰는 능력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더 이상 디지털 기기롤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한다. 하지만 능력있는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면 더 이상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끝없는 효율성과 다채로움에 질려버렸다. 불편하더라도 일일이 페이지를 넘겨가며 무언가를 찾고 싶다. 그렇게 느리게 찾는 도중에 잠시 다른 길로 빠져서 조금 헤매다 나오는 여유로움을 갖고 싶다. 공간만 차지하는 책장을 바라보며 책 제목을 천천히 따라가고 싶다. 배터리가 없다고 울어대는 애플 펜슬 대신 조용히 깎여나가며 사라지는 연필의 우아함을 감상하고 싶다. 조급하게 더 좋아지는 디지털 기기의 기술을 계속 따라가기가 이제는 질렸다.


어쩌면 나이를 먹어서 최신 기술을 쫓아가기가 힘든 건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효율적으로만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가끔 격리되고 싶다. 효율성에서 벗어나 비효율적인 여유를 갖고 싶다. 끝도 없이 울리는 알람에 일일이 반응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조용히 사각거리는 소리만 남은 내 방에 남아 한 숨을 돌리고 싶다. 그렇게 전원을 모두 꺼버리고 아날로그한 물건들 틈으로 도망가버리고 싶다.



Photo by Milk-Te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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