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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Aug 31. 2021

비 오는 날의 기억

우산을 씌워주던 사람


하늘이 무겁다.

비 오는 날의 하늘은 무겁다. 무거운 무채색 하늘이다. 먹구름이 잔뜩 몰려와서는 비를 뿌린다.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던 햇빛을 가려버리고 세상을 점점 무채색으로 물들인다. 그러면 세상은 마치 먹물로 그린 것처럼 어두침침하게 색을 잃어버린다. 이런 날은 몸도 무거워져서 무엇을 할 기력도 나지 않는다. 그저 의자 위에 녹아 붙은 것처럼 무채색 풍경이 되어버린다. 


비 오는 하늘처럼 또는 밤처럼 나는 무채색 옷을 즐겨 입었다. 튀지 않는 색이기도 하지만 무언가 묻어도 크게 티가 안 나서 즐겨 입었다. 색깔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어서 언제나 대충 무채색 옷을 걸치고 밖에 나섰다. 그렇다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비 오는 날은 늘 우울했다. 차 안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면 울적해졌다. 어느 날은 우산을 쓰고 길을 서두르는데 우산에 구멍이 나서 비가 샜다. 그날은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을 삼키며 걸어야 했다. 그보다 더한 날도 있었다. 대학생 때 장마철이었다. 비가 어찌나 많이 오는지 우산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는 날이었다. 그때는 유일한 전재산이었던 노트북을 백팩에 넣고 걷다가 가방이 다 젖을까 봐 가방을 앞으로 메고 품에 꼭 안고 걸었다. 노트북은 다행히 젖지 않았지만, 나는 쫄딱 젖은 채로 20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 집에 가야 했다. 그날은 나보다 기계가 더 중요했던 현실이 너무 슬펐다.


날씨가 꿉꿉하고 음험한 날이면, 이렇게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리는 날씨면, 그런 우울한 기억에 빠졌다. 하염없이 회색인 세상이 습하고 답답했다.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괴로웠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몸부림을 쳐봐도 날씨는 어찌할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내리면 비는 어둠마저 더 어둡게 뭉개버렸다.






언젠가의 장마철이었다. 

잠시 회사 밖으로 나와 은행 업무를 하고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밖으로 막 나왔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았다. 얼른 다녀올 거라고 생각하고 우산을 놓고 나왔다. 하지만 대기가 길어져서 한참 만에 은행 업무가 끝났을 때는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를 맞는 것은 정말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건물 처마 밑에서 비 맞을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눈앞에 밝은 민트색 우산이 펴졌다.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무채색 세상에 혼자 빛이 퍼지는 마냥 민트색이 펼쳐졌다. 세상에는 무채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건널목 앞에는 선명한 노랑 검은색의 안전봉이 있었다. 자동차의 노란 헤드라이트가 비에 젖은 아스팔트 길을 비춰 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란색을 띄웠다. 나는 비를 맞지 않고 회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세상의 색깔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그날 이후 나는 무채색 옷 대신 색이 있는 옷을 사기 시작했다. 검은 운동화 대신 민트색과 분홍색이 섞여 있는 운동화를 샀다. 내 세상에 있었던 무채색들이 하나씩 거두어졌다. 세상 곳곳에 색이 칠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사람을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색깔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비가 오고 어둠이 내렸다. 나는 집 안에 있다. 멀리서 자동차들이 붉은빛의 물결처럼 떠내려간다. 낮은 책장 위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흰색과 검은색의 털을 가진 턱시도 고양이는 연녹색의 눈과 분홍색 코를 가졌다. 나는 고양이의 검은 털을 쓰다듬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전해져 온다. 무채색의 촉감이 더 이상 축축하거나 습하지 않다. 이런 날은 Audrey Assad의 You Speak를 들으며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밝은 민트색 우산을 가진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Photo by Osman Ran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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