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 좋은 사람이 부러웠다
나는 어릴 적부터 체육을 정말 싫어했다.
취미라고는 책을 쌓아놓고 읽거나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움직임과는 거리가 먼 취미들 뿐이니 밖에 나가라고 하면 그렇게 싫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달리기를 하면 세상 그렇게 지칠 수가 없었다. 출발하기 직전의 버스를 잡거나 때때로 약속 시간에 늦은 날은 짧은 거리만 뛰어도 하루 종일 힘이 들었다. 체력이라고는 약에 쓰려해도 없는 사람이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운동에는 기겁을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내가 나를 관리해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운동이 좀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격한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체력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나는 겨우 러닝머신 위에서 숫자를 4로 놓고 '걸었다'. 러닝머신을 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4 정도면은 거의 걷는 수준이지 절대 뛰는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얼마나 체력이 없었던지 4로 놓고 20-30분을 걷고 나면 나는 충분히 지쳤다. 정말 죽지 않으려면 체력을 좀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가 자극을 받은 건 언제나 보던 텔레비전 덕분이었다. 당시 <무한도전>이나 <런닝맨> 같은 예능에 나오는 유느님을 보았을 때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더 체력이 좋아지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나도 저렇게 나이를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상상해보았다. 그때부터 체력이 좋은 사람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식사 조절을 하고 운동 프로그램을 보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도 찾아서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체중도 10kg 이상 줄었고 러닝머신 위에서 인터벌로 뛰었다 걸었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남들에 비하면 보통 정도의 체력이지만 나에게는 큰 발전이었다. 태어나서 내 의지로 뛰어본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했다. 게다가 남들만큼 뛸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하지만 의지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회사를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일에 치였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자연스럽게 운동도 그만두었고 식단 조절도 그만두었다. 기껏 뺀 살이 꾸준히 돌아왔다. 그래도 체력은 그대로 남았는지 어쩌다 한 번 러닝머신 위로 올라가도 남들만큼은 뛸 수 있었다.
그렇게 2-3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2-3년이 지나도 여전히 체력이 좋은 유느님을 보고 다시 자극을 받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체력이 없으니 내가 쉽게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체력이 좋으면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나서서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쉽게 의욕을 잃어버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마침 예전에 연락이 끊어진 친구의 SNS를 어쩌다 보고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저질 체력 중에 저질 체력이던 내가 복싱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복싱은 시작부터 혹독했다. 줄넘기라고는 학교 때 이후로 해본 적이 없었는데, 준비 운동이 줄넘기였다. 3분씩 3세트로 줄넘기를 해야 했다. 30초도 못 뛰었다. 그 이후로는 그냥 헉헉거리면서 어쩌다 한 번씩 줄을 넘어갈 정도였다. 발바닥이 너무 아프고 종아리는 터질 것 같았다. 옆에서 20분이고 30분이고 끝없이 줄넘기를 하는 아저씨가 너무 부러웠다. 준비 운동만으로도 쓰러질 것 같았는데 본 수업은 훨씬 힘들었다. 복싱의 기본 스텝을 배우면서 왜 그렇게 줄넘기를 시키는지 알 것 같았다. 끝없이 폴짝거리며 뛰어야 했다. 그냥 줄넘기의 연장 선상이었다.
그래도 그때만큼은 독한 결심을 했는지 몇 개월을 꾹 참고 다녔다. 운동을 전혀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 나는 몰랐는데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빨리 적응했다. 신기하게도 30초도 뛰기 힘들었던 줄넘기가 1분, 1분 30초, 2분... 이렇게 뛸 수 있게 되더니 2세트 정도는 무난하게 뛸 수 있게 된 것이다. 터질 것 같았던 종아리도 갈수록 뭉치지 않았다. 여전히 본 수업 때는 비지땀을 흘렸지만 확실히 체력이 좋아졌다. 그것도 몇 달만에 무척 많이 좋아졌다. 그때쯤에는 처음 복싱장에 들어온 사람보다 훨씬 오래 뛸 수 있었고 체력 운동을 해도 혼자 뒤떨어지지 않았다. 샌드백을 치는 재미도 꽤 있었다.
운동량이 갑자기 늘어나니 식욕도 부쩍 좋아져서 체중이 많이 줄지는 않았지만, 몸은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근육도 많이 붙고 코어 힘도 좋아져서 힘든 동작도 곧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한 건 그때 나는 정말 성격이 밝아졌다. 얼굴이 달라졌다는 말도 들었고 표정이 많이 바뀌었다는 말도 들었다. 일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고 뭐라도 하나 더 하려는 마음도 생겼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사람들에게도 덜 예민해졌고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그런 긍정적인 변화가 너무 좋아서 나는 2년 여 복싱을 다녔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실내 운동을 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퇴근을 하면 회사 근처의 복싱장에 다녔는데 이제는 재택근무를 하게 되어 복싱장까지 가기도 애매해졌다. 어쩔 수 없이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는 운동을 그만두었다. 요즘처럼 거리두기 단계가 4단계로 올라가면 운동은커녕 집에 꼼짝없이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 가만히 있다 보니 다시 살이 오르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은 기분이 든다. 한창 줄넘기를 많이 할 때는 발도 가벼웠는데 이제는 다시 발이 무거워졌다. 어서 코로나가 종식되어 다시 마음 놓고 운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유느님처럼 나도 멋지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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