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끝나긴 하겠지
가방에 책 한 권을 챙긴다. 작은 책일수록 좋다. 붐비는 지하철은 책을 읽기에 너무나 좁으니까. 지하철을 타고 책을 읽고 있으면 점점 사람이 많이 타기 시작한다. 그러면 결국 읽지 못하고 책을 가슴에 품는다. 그 상태로 책을 아주 조금 기울여서 흘끔흘끔 읽는다. 흔들리기까지 하는 지하철에서 비좁게 책을 읽는 것은 고난이도의 기술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혼자 생각하며 뿌듯해하곤 한다.
그렇게 힘들게 책을 읽으면서도 막상 내릴 때가 되면 아쉽다. 책을 읽는 걸 그만두고 회사로 출근해야 하니까 말이다. 뒷내용이 궁금해서 걸으면서도 읽고 싶지만, 아무래도 지하철역이나 거리에서 책을 읽는 건 위험하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는 것도 위험한데 책 읽으며 걷는 것이 안전할리 없다. 그러니 아쉽지만 책은 도로 가방 속에 넣는다.
퇴근길도 마찬가지다. 붐비는 지하철 틈바구니에서 좁게 책을 읽는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낮 시간 내내 궁금했던 뒷내용을 읽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사람들이 내려서 지하철이 한산해진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다시 책을 가방에 넣고 바삐 집으로 향한다. 배가 고픈 것도 있지만, 책을 마저 읽기 위해서다.
나만의 비밀 하나를 말하자면, 회사에 출근하면 책을 꺼내지 않는다. 업무 관련 도서라면 꺼내두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책이라면 굳이 꺼내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걸로 주목을 받는 일이 남사스럽다. 괜히 할 일 없어 보일 수도 있고 말이다. 나는 책을 꽁꽁 숨겨놓고 읽는다. 뭐, 어떤 사람은 책을 읽는다는 걸 주변에 알리고 회사에서 책과 관련된 이런 저런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는다. 책과 관련된 활동만은 회사랑 상관없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독서만큼은 내 사생활로 남겨두고 싶다. 이렇게 브런치나 인스타그램에 책에 관련된 소리를 해대는 걸로 나는 만족한다. 사적인 관계나 온라인으로 만난 관계에서만 어떤 책이 재밌었고 독서가 어떻고 하는 소리를 신나게 해댄다.
코로나 이후로는 이런 일도 없어졌다. 재택근무로 바뀌면서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일도 없어졌고 책을 가방 속에 숨기는 일도 없어졌다. 회사를 왔다갔다하면서 책을 읽는 대신 그 시간을 아껴서 집에서 편하게 책을 읽는다. 눈뜨면 책상에 앉아 출근하고 퇴근하면 바로 컴퓨터를 덮고 책을 읽는다. 점심을 먹고 시간이 남으면 책을 펴고 읽기도 한다. 재택근무 덕택에 편해지긴 했다.
하지만 취미는 책 읽기보다 책 사기다. 주중의 스트레스를 지름으로 버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나다. 책은 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재미있다. 온라인 서점의 장바구니에 책을 잔뜩 담아놓고 언젠가는 지르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흐뭇하게 바라본다. 서점에 들러서 가끔 충동구매를 하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 그렇게 사놓고 다 읽지 못해서 늘 후회하지만 역시 무언가를 사는 건 재미있다. 취미 생활에 돈 많이 쓰는 부류가 있는데 나도 그런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내 마음 속에도 사직서가 하나 있다. 다 때려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때려치면 어쩔 거냐고? 나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 좀 더 진심으로 책에 파묻히고 싶다. 돈만 좀 있다면 책도 마음껏 사고 시간이 허락하는만큼 책을 읽고 싶다. 마음 한 켠에는 정말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 사직서가 조금은 구체적인 것 같아 내심 흐뭇하다. 언젠가 정말 사직서를 내는 그 날을 세세하게 상상하게 된다. 현실은 대출과 쥐꼬리만한 통장잔고 뿐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니 다행이라고 애써 긍정해본다. 직장인의 취미 생활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꼭 독서가 아니라도 취미는 생활의 활력이 되고 월급의 의미를 찾아준다. 또한 언젠가는 취미로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게 해준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곁에 있는 책을 쓰다듬게 된다. 마치 언젠가는 책이 나를 회사로부터 탈출시켜 줄 것처럼 말이다. 그래,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정말로 책이 나를 해방시켜줄지. 그 때까지는 이렇게 나만의 비밀스러운 취미를 꾸준히 간직하려 한다. 회사에서 벗어나는 그 날까지 취미 하나씩 품고 있는 직장인들 모두 힘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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